강남 ㅇㅇ어학원 강사라는 본업 외에, 삼성, LG, 밴처기업 출강 및 문화센터 강사, 외고 학생과외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써넣고 싶은 욕심과 에너지로 가득했던 때였다.
결혼 후에도 남편보다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 주말엔 특강과 과외 그리고늘 새로 시작되는 출강으로 인해 집에 와서도 쉴 틈 없이 수업준비를 해야 했는데 새벽까지 식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이렇게 공부만 열심히 하는 줄 알았음 결혼 안 했다"
평범한 주부, 경단녀가 되다
남편의 미국 지사 발령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조금 쉬었다 다시 달려도 된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두 언어를 동시에 가르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나만의 커리어를 중단하고 남편과 함께 텍사스라는 낯선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새로 둥지를 튼 곳에서는 나의 경력과 체류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의 선택 폭이 좁았고, 천천히 환경에 적응하며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봐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긴 휴가를 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낯선 공간 속에서 살며, 부딪히며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거랑 내 자식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던 옛 말처럼 내 자식에게 따뜻한 밥 먹이는 행복이 가장 큰, 경력 단절녀 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멈춰버린 엄마의 시계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에서의 내 시계는 7,80년대 한국 엄마들의 일상에 멈춰있었는 듯하다. 남편이 퇴근하고, 아이들이 집에 오는 시간엔 꼭 엄마가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따쑨 밥 한끼가 세상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좌충우돌 살며, 부딪기며 세 아이를 키우다 보니 20년이 흘렀고 조금씩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지나치게 길어진 휴가에 가슴 깊이 숨겨둔 한 곳에서 불안함과 답답함이 밀려왔다.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은..
'한국에 있었음 혹시 일타강사가 되어있진 않을까?'하는 헛된 상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렇게 밥만 하다 늙어 죽긴 싫다
상상하고 푸념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푸념을 늘어놓는 대상은 늘 정해져 있었다. 언제나 내 편인 언니였다.
"너무 아깝지 않아?"
"넌 잘할 수 있어!"
"맨날 이렇게 가족 단톡방에 사진만 올리다가 인생 끝낼 거야?"
"네가 안 하면 누가 해?"
"일단 시작해 봐"
"너 끈기 있잖아"
"도대체 뭐가 망설여지는데?"
"어차피 하는 부엌일에 핸드폰 거치대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건데..."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보라는 언니의 끊임없는 충고가 3년째 이어졌지만 처음엔 귀 담아 듣지 않았고 그 후 계속되는 회유와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솔직한 충고에도 선뜻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오랜 강사 경력이 있으니 그래 말은 어찌어찌한다고 해도 촬영, 편집.. 모든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아침, 점심, 저녁 식탁을 부담 없이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보란다.
어차피 동영상이란 여러 장의 스틸 사진이 이어진 포맷이다. 스틸 사진 촬영은 음식 사진, 아이들 사진, 셀카 등 수백만 장 촬영을 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동영상 촬영과 편집이라는 과제는 과연 내가 넘을 수 있는 산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진짜 안 할 거야?"
"응"
"그래 평생 그렇게 부엌에서 밥만 하다가 늙어 죽어"
오늘은 좀 세게 들어온다. 어? 이건 뭐지?' 하며 머리가 띵해져 오는데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럼 잠이나 자..."
하며 끊어 버린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는 걸 느꼈다. 현직 잘 나가는 교수한테 듣는 질타는 그날따라 너무도 초라한 내 모습과 교차되며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할까 말까 쓸데없는 고민만 하다 3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고 언니의 최후통첩에 정신을 차렸다.
새로운 이력서를 쓰다
2020년 7월.. 큰 용기를 내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고 올해로 3년이 되었다.
2023년 7월.. 이제 다시 브런치 스토리 작가로 어려운 발걸음을 시작하며 나만의 레쥬메에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작가'라는 커리어를 더한다.
살아가는 한순간 한순간이 설렘의 연속이다. 인생.. 살 만하다!
지금도 유튜브에 지칠 때마다 혼자 되뇌곤 하는 문구, 그리고 브런치 스토리 작가를 시작할 때에도 마음속 서랍에서 꺼내어 다시 한번 읽어본 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