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잇몸을 자르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그게 내가 될 거라는 건 더더욱.
“보호자분! 보호자분!” 수술 후 첫 기억은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환자 보호자 없어?” 남자의 목소리에 이번엔 짜증이 묻어있었다. 눈을 살짝 떠보니 파란 수술복을 입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침대에 눕혀진 채 좁은 복도에 놓여 있었다. 옆에 있던 커다란 문이 계속 열리고 닫히길 반복했다. 간단한 수술인데 보호자가 필요한 거였나? 반은 잠에 취한 상태로 든 생각이었다. 아, 병실로 데려갈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그 정신으로 납득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할 리가 없다. 나 혼자였으니까. 의식은 돌아오고 있지만 눈을 뜰 수는 없었다. 어쩐지 미안했다. 다급한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에서 ‘바빠 죽겠는데, 데려갈 사람도 없어?’라는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가만있으면 누군가는 날 데려다주겠지 싶어, 모른 척하기로 했다. 기척도 내지 않고 쥐 죽은 듯 가만있었다.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 나는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가 덜컹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바퀴 네 개가 굴러가는 리듬에 맞춰 내 몸도 흔들렸다. 침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간 뒤, 내가 머물던 병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침대까지 다다르자 할 일을 다한 발자국 소리가 급하게 사라졌다. 이제 정말 혼자였다.
나는 대학생이었다. 어린 나이도 아니기에 혼자도 상관없다 생각했지만 막상 수술이 끝나자 울컥 서러움이 몰려왔다. 마침 겨울이었고 수술이 끝난 시간은 저녁이었다. ‘연말 모임이 딸 수술보다 중요하다고?’ 괜히 엄마 아빠에게 섭섭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사랑니 세 개를 빼는 김에 잇몸까지 자른 건 나의 결정도 아니었다. 때마침 마취가 조금씩 풀리면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러움을 자극하기엔 완벽한 조합이었다. 기어이 잇몸을 잘랐네, 나는.
처음 이대목동병원을 찾은 목적은 세 개의 사랑니를 뽑는 것이었다. 의사는 하루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단순히 이빨을 뽑는 데 입원씩이나? 의아했지만 의사 말로는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입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중, 엄마가 대뜸 묻는다.
“애가 웃을 때마다 잇몸이 너무 많이 보이는데, 이것도 자를 수 있나요?”
나한테 한마디 언질도 없이 갑자기? 세상에, 잇몸을 자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보다 신기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놀라움이 채 가라앉기도 전, 당사자를 제외한 둘의 결정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입원한 김에 위쪽 잇몸을 자르기로.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렇게까지 싫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갑자기 생각한 걸로 보이지 않았다. 의사랑 미리 입을 맞춘 게 분명했다.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다. 사건의 전말이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내가 웃을 때마다 잇몸이 보인다며 지적했으니까.
나는 치아가 낮은 편이었고, 짧은 치아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당연히 잇몸이었다. 조금만 크게 웃어도 핑크색 잇몸이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엄마는 그걸 싫어했다. 평소에는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다가도, 유독 웃을 때는 차갑게 말씀하시곤 했다. 크게 웃지 말라고.
당시 우리 집 식탁에는 아빠가 일본에서 사 오신 작은 텔레비전이 있었다. 화면은 내 손바닥만 한데 두께는 15cm쯤 되는, 색도 선명하지 않던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때마다 “잇몸 보여.” 어김없이 엄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러니 웃을 때마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크게 웃으면 안 돼. 잇몸 보이지 않게 조심해. 꼴 보기 싫으니까.’ 나도 모르게 웃다가도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내성적이었던 나는 크게 웃지 못하는 아이가 되고 말았다.
병실에 붙어있는 거울 앞에 섰다. 잇몸에는 투명 테이프가 붙어있고, 그 안에 피가 고여있었다.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혼자 짐을 챙기고 있을 때, 간호사가 들어와 간단하게 앞으로의 일을 설명했다. “2주 동안 잇몸에 붙어있는 테이프 떼지 마세요.” 그녀가 마지막 말을 뱉을 때까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입원복을 가지런히 챙겨 침대에 올려두었다. 보호자가 없던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짐을 챙겨서 병실을 나섰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찬 공기가 확 몰려왔다. 입 안에 머물던 더운 공기가 하얀색 김을 만들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내리면 좋겠건만, 시커먼 하늘은 고요하기만 하다. 병원 앞에 서있던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조용히 창 밖을 바라봤다. 집에 가봤자 혼자다. 엄마 아빠는 모임에서 안 오셨을 테니까.
생각보다 잇몸을 자른 부분의 통증이 심했다. 말이 테이프지 물기가 있다 보니 자꾸 움직여 고정이 잘 되지 않았다. 그 안에는 피딱지가 응고되어 있었고, 투명한 덕에 더 잘 보였다. 징그러웠다. 밥을 먹기도, 누구를 만나도, 아니 그냥 가만있어도 괴로웠다. 크게 웃지 말라더니 이걸 붙이고는 정말 크게 웃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웃음이 나면 윗입술을 붙잡고 웃어야 했다. 잇몸을 자르고 나면 마음껏 웃으려나 했는데 그 과정이 꽤나 어려웠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지루한 시기가 지나고 드디어 기분 나쁘게 엉겨 붙던 테이프를 떼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웃어보는데 꽤 마음에 들었다. 엄마 때문에 억지로 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내심 기대를 했나 보다. 잘라낼 수 있는 잇몸의 높이가 한계가 있다 보니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덜 보였다. '이제는 마음껏 웃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내 입은 굳어져 있었다. 이제는 크게 웃어도 핑크색이 많이 보이지 않는데도 여전히 활짝 웃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웃고 싶을 때 편하게 웃고 싶었다. 호탕하게 마음에 담긴 소리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웃을 때마다 신경 쓰고 산 세월이 족히 18년은 넘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내는 아기 때부터 정말 잘 웃는 아이였다. 자고 일어나도 울지를 않아서 깬 줄도 몰랐다. 왜 이렇게 오래 자나 싶어서 가보면 이미 깨서 모빌을 보고 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면 반달눈이 되어서는 소리도 내지 않고 방긋 웃는 아기였다. 첫째는 잘 웃지 않았고, 둘째는 하도 울어대서 힘들었던 기억만 남아있는데 막내는 달랐다. 이보다 더 크게 웃을 수 없다 싶을 만큼 방긋 웃었다. 그 미소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았다. 웃을 때마다 이빨도 없이 잇몸만 만개했다. 나랑 꼭 닮은 핑크색 잇몸. 아기인데도 그게 보였다. 내 눈엔 이쁘기만 한 핑크색 잇몸이.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내 잇몸이 신경 쓰였던 걸까? 적어도 웃는 모습만큼은 이쁘다 해줄 수는 없었는지, 나를 그대로 바라봐 주었다면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저 당신 딸이 조금 더 예뻐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었겠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나는 아이들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면 좋겠다. 웃고 싶을 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길, 스스로의 미소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그래서 여전히 웃을 때마다 잇몸이 보이는 아이에게 말해주곤 한다. 웃을 때 참 이쁘다고. 핑크 웃음을 가진 네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그러면 아이는 일부러 더 크게 웃는다. 사랑스럽다. 그깟 잇몸 좀 보이면 어떤가? 이렇게 빛나는 것을.
그때부터 20년이 또 지났지만 여전히 웃을 때 신경이 쓰인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그 산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넘지 못했다. 이건 타고난 성격 탓인지 어릴 때 트라우마 탓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아직도 내가 웃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억지로 웃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어색한 웃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얼마 전 나처럼 평생 부자연스럽게 웃던(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사람의 이야기를 봤다. 믿기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를 하고 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람은 매일 거울을 보고 연습했다고 한다. 계속 웃어야 얼굴 근육도 풀린다나. 연습만으로 저런 미소를 얻을 수 있다면, 오늘부터 나도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