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중인데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휴스턴에는 한국 직항이 없다. 작년에 부모님이 오실 때는 어딘가에서 경유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가족 마일리지를 모두 끌어모아 오시느라 직항이 있는 달라스까지만 오실 수 있었다. 남편이 모시러 가기로 했다. 편도 4시간 반. 일요일 아침 8시 도착이라 남편이 막내를 데리고 하루 전날 달라스로 떠났다. 둘은 아침부터 가방을 싣고 홀연히 사라지더니 달라스 식물원에 간 사진을 여러 장 보내온다.
그리고 일요일 9시 30분경. 남편에게 문자가 날아온다. '이제 만났고 곧 출발해'라고.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차고로 차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작년에도 오셨으니 1년 만이다. 조금 긴장된다. 반가워서이기도 하지만 무뚝뚝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목적이 크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크게 웃으려고. 환영의 의미를 얼굴에 담으려고 말이다.
자, 미소는 준비되었다. 보조석에 앉아있는 아빠 얼굴이 보인다. 남편은 피곤해 보이고, 아빠는 멍해 보인다. 손을 흔들어도 불과 3미터 앞에 있는 나를 보지 못한다. 차가 멈추고 아빠가 먼저 차에서 내린다. 아빠!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표정도 없다. "간장게장 녹았나 봐야 해" 아빠의 첫 마디였다.
번거롭게 가져오지 말라던 간장게장. 연희동 '수빈'에서 3마리에 10만 원을 주고 사시겠다고 했을 때 나는 분명 말렸다.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채워 달라스까지 가져오라는 말에 단칼에 거절했다. "준우가 좋아하는데..." 말 끝에서 아쉬움을 분명 느끼긴 했다. 하지만 달라스에서 집까지는 4시간 반이다. 게다가 남편은 하루 전날 출발하는데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채워간들 얼마나 오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남편은 공항에서 가방을 펼쳐, 간장게장을 꺼내, 아이스박스에 옮겨 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두 분은 손주가 간장게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기어이 사셨나 보다. 아니, 사실은 딸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빈' 간장게장을 좋아했으니까. 분명 전에 오빠 내외랑 그곳에 갔을 때 내 생각도 하셨으리라. 하지만 딸이 필요 없다 할 게 뻔하기에, 손주를 방패로 삼으셨지 않을까.
아빠는 오는 내내 간장게장이 걱정되셨던 것 같다. 나중에 들어보니 텍사스는 생각보다 아직 더웠고, 낮에 점심 먹는 동안 더운 차에서 버티고 있을 게장이 걱정이 됐다고 한다. 여하튼 아빠는 그런 이유로 딸내미는 안중에도 없고, 간장게장 걱정만 하고 계셨던 거다.
큰 가방의 반을 차지하는 보냉가방을 열자, 간장 범벅이다. 똑같이 간장이 묻은 다른 반찬통들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더덕구이, 젓갈, 명란젓, 고들빼기, 무말랭이, 그리고 가장 커다란 통에 문제의 간장게장. 엄마는 옆에서 "거봐, 내가 국물 따로 담자고 했지"라며 흐른 국물을 아까워하시고, 아빠는 아직도 차가운 데에 안심하신다.
간장게장이라... 곤란하다. 나는 요즘 밥은 잘 먹지도 않는다. 비록 몸무게는 잘 줄지 않지만, 꽤 건강하게 잘 먹고 있단 말이다. 덕분에 야채와도 꽤 친해졌다. 이제 겨우, 친해졌다 말이다. 근데 간장게장은 밥도둑이 아니던가. 짭조름한 간장게장은 밥을 부르고 또 부를 거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나의 이성의 끈은 툭 하고 끊어질 거다.
나머지 반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맹숭맹숭한 음식들이 아니니 모두 밥반찬이다. 이걸 다 먹으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밥을 먹어야 하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 싸다 주신 거, 너무 감사하다. 준비하면서 설레었을 부모님의 마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앞에서 나는 최대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맛있다!"연발해야 한다. 그게 효도고,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역시나 곤란하다. 지금은.
어제저녁, 새 밥을 지었다. 아들은 긴 접시에 간장게장 반 마리와 게딱지, 그리고 국물을 조금 덜어갔다. 밥솥에 있던 밥을 크게 떠서 비벼먹기 시작한다. 잠시 후, 다시 밥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나 밥도둑은 더 많은 밥을 부른다. 둘째는 할아버지가 챙겨 온 우동을, 남편은 간장게장과 더덕구이를 먹었다. 나만 남았다.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차례다. 부모님의 눈빛에서 '기대'를 읽어버렸다.
하지만 내일은 또 다이어트 연재일이 아니던가. 하루만, 하루만 참기로 한다. 아침에 몸무게 딱 재고, 글 올리고 후련하게 점심에 한 끼만 먹자고. 내 사랑 간장게장을 말이다. "나는 내일 점심에 먹을게요" 드디어 말을 뱉었다. 그래서 오늘 점심이 진심으로 기대된다. 행복하다.
기록 차원에서 일주일 업데이트를 좀 해본다.
1. 드디어 피트니스 센터에 발을 들였다. 아는 분을 따라 줌바 수업을 1시간 들었다. 이미 2시간 걷고 난 후였지만, 여러 가지가 운동 요소가 섞인 그 수업은 나랑 꽤 잘 맞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니 자존심 때문에 중간에 멈추지도 못했다. 또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덤벨도 무게 있는 걸 들었다. 시간이 잘 가지도 않고, 마이크로 떠드는 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참여했다. 누가 보든 말든 마음대로.
2. 식단은 나름 잘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번주에는 중간에 크로와상 한 개와, 작은 밤빵 하나와, 아이가 남긴 비빔면을 먹은 날도 있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먹고 나서, 배가 불편해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참지 못해서 자책을 한 게 아니라 단순하게 속이 불편해서다. 큰 발전이다. 그전에는 이 정도까지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이게 고스란히 느껴지니 말이다.
3. <해독 혁명>을 완독 했다. 거기에 나오는 십자화과 스무디를 조만간 시도해보려고 한다. 과일이 들어간 어린이 버전으로! (책에는 여러 종류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