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등장, 우연 같은 필연

어느 학자의 질문 "우리는 또 다른 이순신을 바랄 수 있는가?"

by 서창현
지난 12월 20일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가 다루는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끝이자, 파란만장했던 이순신 개인의 마지막이었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삶은 순탄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당시 군인으로 활동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북방 여진족들과의 전투를 통해 경력을 쌓았지만, 상관의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는 등 숱한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말직에 머물던 이순신을 선조에게 추천하였고, 곧 이순신은 선조의 특명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여 전라좌수사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순신의 승진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인사 논란'에 휩싸일 정도였지만 선조는 이를 강행했고, 결과론적으로 이 조치는 조선을 구한 한 수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금은 물론 조선시대에도 '신의 한 수'로 여겨졌던 이순신의 승진, 그리고 이에 대한 후대의 촌평입니다.


이순신을 모신 현충사. 말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은 임진왜란 직전 날아오르다시피 승진을 거듭했고, 이는 성웅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되었다.


1589년 12월, 이순신은 정읍현감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순신이 벼슬길에 나선 지 14년 만인 45세 때의 일이었죠. 조선시대에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들은 부윤이나 목사, 군수, 현령 등 다양한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현감'은 그 지방관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벼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부터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등의 더 높은 관직으로 연달아 승진하더니, 급기야 1591년 2월에는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국왕의 무리하거나 부당한 명령 등에 반대하고 조언을 하는 사간원 관리들이 즉시 선조에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사간원에서 한 말이 재미있는데요. 그들은 "현감 벼슬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군수로 승진시키시더니, 이순신이 군수로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좌수사로 또 승진시키시다니 이건 부당합니다!"라며 선조의 인사조치를 '지나친 남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갑주 두정갑. 안에 작은 철판 등을 넣고 외피를 씌운 뒤 못질하여 만든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매혹의 걸작들'에서 전시되었던 유물.


조선시대의 관직은 정1품-종1품-(중략)-정9품-종9품 순서의 18품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현감이 종6품이었으니 2년 만에 무려 7품이나 오른 셈이죠.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이 약 2년 만에 5~6급 정도로 승진한 셈입니다. 아무리 이순신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서 '근무 성적'이 좋은 인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라좌수군이라는 함대급 규모의 부대를 맡을 만한 인물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의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사간원의 주장이 더 일리 있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의 승진이 그러한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상규에 얽매일 때가 아니다. 인재가 너무 없으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은 충분히 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니 벼슬이 높고 낮고를 따질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해서 이순신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지 말라."고 잘라 말하면서 인사조치를 강행했죠.

《징비록》의 제목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 임진왜란 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사진은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물.


하지만 선조가 별 다른 이유도 없이, 독단적으로 이순신을 발굴하고 과감하게 인사를 강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선조에게 추천하였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성룡이었습니다.


유성룡은 조선 최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고, 임진왜란 내내 조선의 '컨트롤타워'로서 대활약한 유능한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후에는 당시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책 《징비록(懲毖錄)》을 남겨 조선이 임진왜란과 같은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교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선무원종공신록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순신은 권율 등과 함께 1등공신이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물.


이처럼 유성룡은 자신의 학문적, 행정적 능력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그의 온갖 업적보다도 이순신을 발탁한 것을 더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징비록》을 읽고 아래와 같은 글을 썼죠.


남들은 임진왜란 때 서애 유 선생께서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 (국난 극복에)공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공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공이 있다. 당시에 나라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충무공 한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처음 이충무공께서는 겨우 일개 편비(각 군영마다 있던 부하 장수)에 지나지 않으셨으니, 유 선생이 아니었다면 단지 이름 없는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를 중흥시키고 평안하게 만든 공적은 누구를 통해 이루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유성룡이 전쟁 당시에 보여주었던 활약상만을 이야기하지만, 이익은 그것조차도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만큼 이순신을 발탁한 공이 높다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익은 공자조차도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인물보다도 그를 추천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더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며, 유성룡의 이순신 발굴 역시 그러한 일이라고 칭송하였죠. 이익의 이러한 생각은 글 바로 첫 문장에서부터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면 높은 상을 받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이익의 이런 평가는 사실 그리 특이할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능력을 펼칠 여건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이익의 이 말은 '낭중지추', 즉 '주머니 안의 송곳'이라는 고사성어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에 넣기만 하면 알아서 주머니를 뚫고 빠져나오며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 주머니에 넣어야 가능하지, 애초에 주머니에 넣어주지도 않는다면 아무리 끝이 날카롭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죠.


이순신의 활약은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구나 드라마틱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순신의 활약은 결코 조선이 '운이 좋아' 얻을 수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성룡, 그리고 조선이 이순신이라는 '송곳'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죠. 이익은 "최근에는 옛날의 법도를 시행하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지는 못할 망정 시기하고 질투하기만 하니 슬프다."며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세태를 한탄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익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우리 사회는 제2, 제3의 이순신을 발탁할 안목과 활용할 역량이 있는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조 사료

이익, 《성호전집(星湖全集)》권56, <징비록 말미에 쓰다(書懲毖錄後)>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G&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489A_0560_010_0020&viewSync=OT)

《선조실록》권25, 선조 24년(1591) 2월 16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402016_002)


이미지 출처

1.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etc&mra=bkEw&pkid=68&os=17384291&qvt=0&query=%EB%85%B8%EB%9F%89%3A%20%EC%A3%BD%EC%9D%8C%EC%9D%98%20%EB%B0%94%EB%8B%A4%20%ED%8F%AC%ED%86%A0)

2. 현충사(직접 촬영)

3.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 매혹의 걸작들'(2022.10.25~2023.3.15) 전시 두정갑. 1892년 조선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수교를 기념하여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선물한 갑주이다(직접 촬영)

4. 징비록(서울역사박물관 전시물, 직접 촬영)

5. 선무원종공신록(서울역사박물관 전시물,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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