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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Nov 25. 2019

물질과 정신

심신 문제에 대한 한스 요나스의 시선

한스 요나스Hans Jonas『물질, 정신, 창조: 우주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철학적 성찰Materie, Geist und Schöpfung: Kosmologischer Befund und kosmogonische Vermutung에서 물질 인간 정신에 이르 우주의 역사를 고찰한다. 그 사변적 작업은 기실 추측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철학을 한다는  반드시 참인 명제를 나열하는 일이 될 필요가 있을까? 『물질, 정신 창조』 일원론적 세계관 아래에서 심신문제mind-body problem접근한다. 과연 정신이 물질로부터 산출된 것은 순전한 우연에 의한 것일까?


I

인간은 가치관을 갖고, 항상 무언가를 의지한다. 유기체가 등장하면서 그 내부에 이러한 정신까지 등장한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경험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단순히 유기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물리적·화학적 질서에만 의거해 이 사건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들로서의 물질 덩어리들은 이 유기체가 갖게 될 정신에 대한 그 어떤 데이터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과 정신이 같은 것도 아니다. 전자는 후자가 갖지 않는 연장성extension을 갖는 반면, 후자는 전자가 갖지 않는 의식consciousness을 갖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단순히 이 세계에 공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 상호 의존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수수께끼가 되고, 이를 마주한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이며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르케고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들이 몸과 마음을 존재론적으로 갈라놓은 덕분에 그 오랜 철학사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내면을 향했다. 변치 않는 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초월적 세계가 무너진 오늘날 실체이원론이 딛고 설 자리란 없다. 요나스는 일원론적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동물과 인간의 내면에서 싹튼 주관성의 목소리가 언젠가 말 없는 물질의 소용돌이 위로 떠올랐지만" 그것은 이미 "물질에 밀착되어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p. 40). 목소리가 없는 물질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 정신에 의해 간접적으로나마 발언권을 획득한다. 그런데 정신은 물질에 의해 나타나는 무엇이 아니던가? 요나스는 먼저 "'물질'의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교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물리학physics에서 말하는 계량 가능성은 어쩌면 우리가 물질로부터 추상해낸 물질의 한 면모가 아닐까? 물질은 어쩌면 계량 가능성을 넘어선 무언가를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학을 넘어서는 일이다. 메타-물리학meta-physics,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metaphysics으로 나아간다.


II

정신이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물질에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요나스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이건 물질이 소립자 단위부터 곧 정신적 차원을 갖고 있다거나, 정신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등장하게 한 모종의 목적이 물질에 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물질의 내부에 정신의 출현이란 사건을 조장하는 어떤 것, 정신의 출현을 선호하는 어떤 것이 존재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요나스는 의지와 같은 그 어떤 것이 그것을 산출한 물질과 완전히 추상된 것일 리는 없다고 본다(p. 48). 그가 초자연적인 목적 - 우주기원론적 로고스 - 을 상정하는 건 아니다. 물질에 내재한 것은 어떤 계획이 아니다. 우주의 발전 과정에서 생명이 등장한 것은 기막히게 놀라운 일이지만 어찌 됐든 우연이다. 하지만 생명은 우연히 찾아온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계획은 없었으나 단순히 중립적이기만 한 우연 이상의 무언가 - 우주기원론적 에로스 - 는 있었을 것이다. 대개 물리학자들이 물질에 귀속시키는 물리적 속성을 넘어선 바로 이 무언가를 밝혀내는 일이 메타-물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된다.

스스로를 열렬히 긍정하는 생명의 자기목적성이 물질에 내재한다면 그 주관성 역시 물질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산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요나스의 이런 생각은 중립적인 작용인들의 체계 속으로 목적인이 들어설 가능성을 열어둔다. 자기목적적인 정신이 이미 작용인들 사이에 내재적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초월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목적인은 작용인에 논리적으로 선행하지 않는다.

내재적 목적론immanent teleology, 그건 그저 생명이 토해내는 존재론적 목소리에 근거할 뿐이라고 요나스는 말한다. "나는 (…) 이것을 믿는다. 그러나 (…) 알 수는 없"다(p. 52). 자연이 스스로를 생명으로서 실현하고자 하는 모종의 의지 혹은 동경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는 게 요나스의 사변이다.


III

요나스더 나아가 생명 일반의 목소리에 더해 인간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정신에 대해 사유하는 정신, 곧 물질에 내재한 생명을 향한 목적성에 대해 사유하는 정신은 이렇게 사유함으로써 초월한다.

그러나 사유되는 정신도, 그리고 사유하는 정신도 여전히 자연의 품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정신은 초월해 있는 - 초월적인transzendentale -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transzendierende 것이 된다.

내재적 초월, 이제 인간은 자연 너머에 초월을 상정하지 않아도 정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맞이한다.


한스 요나스, 『물질, 정신, 창조: 우주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철학적 성찰』 (김종국譯), 철학과현실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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