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의의는 무엇인가. 운동이라기엔 효과가 적습니다. 매일 아침 눈뜨기도 힘겨운 우리 현대인에게 에너지란, 출근길 버스에서 덜덜거리는 창문을 베개 삼아 졸며 아껴도 모자란 것입니다. 해서, 몸매를 가꾸거나 체력을 기르고자 하는 이는 산책보다는 바벨 들기나 달리기를 해야겠습니다.
이동이라기엔 너무 느린 것 같습니다. 시간을 쏜살, 즉 날아가는 화살에 빗대는 표현은 옛날에 만들어 졌을테니, 요즘이라면 쏜 탄알 같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말을 길들이고 차와 비행기를 발명했는데도 굳이 걸어 이동하는 건 과학 발전의 역사에 대한 역행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에너지와 시간이라는 비용에 대해 편익이 시원찮으니 산책을 사치라 봐도 될까요. 그렇다면 평일엔 퇴근길을 걷고, 주말엔 집에 돌아오기 위해 집을 나서 걷는 나는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진 사람이겠습니다. 나를 성급하게 비판하실지도 모르니, 다음과 같이 변명해봅니다.
산책을 하면 공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버스로 통근하며 수동적으로 경험하던 서울의 장면은 그저 평면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책을 하면 내가 가보고 싶은 길을 고를 수 있는데요, 이렇게 다른 경로를 더해갈 때마다 머릿속 지도에 입체감이 더해졌습니다.
마음을 신선한 생각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자존감 수업(저자 윤홍균)"에서 양측성 자극이란 개념이 소개됩니다. 뇌의 양쪽을 번갈아가며 자극하면 굳어있던 생각 회로가 느슨해지는데, 이런 양측성 자극의 대표적 예가 바로 걷기입니다. 낡은 생각 회로가 헐거워지면 그 틈으로 새로운 생각들이 솟아납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산책하기에는 추워져갑니다. 하지만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늙은 단풍잎도 아직은 햇살을 받으면 새빨간 젊음의 흔적이 비치고요,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도 가을 감촉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걸어봄 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