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펜딕티스,, 이게 뭔가요? 분명 오진일 거라 생각했어요.
캐나다에 온지 한달이 지났다. 9주를 계획하고 왔으니 반 정도가 지난 셈이다. 이곳에 오면서 계획이 많았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조용히 외딴 곳에 있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만의 시간을 잘 만들어서 좋은 글도 써보고 싶었다. 기존에 생각했던 것들도 정리하고, 캐나다에서의 일상도 정리해보고 싶었다. 욕심이 많았었다.
생각보다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장소가 주는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한국에서 나의 책상에서 글을 쓰던 패턴이 무너졌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 주는 안락함이 있었나보다. 글을 쓰기 힘들었다. 습관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있어 환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물론 나의 마음가짐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누나네 가족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아이들의 최종 책임자는 나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하나 하나의 행동에 신경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행여나 아이들이 캠프에 적응하지 못할까 맘을 졸여야했고, 아이들 도시락을 무얼로 싸야 할지 매일 고민해야 했다. 아침부터 도시락을 챙기고, 아이들 라이딩을 하고 오후에 아이들 데리고 와서 밥을 해먹이고 돌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물론 이것 또한 핑계였겠지만 그랬다.
그리고 지난 몇주간 진짜 글을 못 쓴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첫 며칠은 미칠듯이 무서웠고, 그 다음 며칠은 나 스스로를 자책했다. 도대체 뭘 얻기 위해 휴직까지 해서 이곳에 와서 아이들을 고생시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는 게 힘들었다. 글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글을 쓰는 게 의미없어 보였다. 글을 쓰면 상황이 더 안좋아 질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그 일이 마무리되고 한참 동안도 그 때의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었다. 왠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불안한 상황이 올까봐서였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고, 아니 다 회복된 듯 싶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아니 그렇게 될 거라 믿고 그때의 사건을 정리해볼까 한다.
이곳에 온 지 10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은 캐나다 생활에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걱정했던 캠프 생활도 즐기는 듯 했다. 영어를 못해도 눈치코치껏 알아들으며 축구도 하고 게임도 하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냈다. 매일 오후 픽업을 갈때마다 아이들이 신나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때쯤 어느 정도의 여유를 나 또한 찾을 수 있었다. 처음 왔을 때 가졌던 두려운 마음이 안개 걷히듯 사라지는 듯 싶었다.
아이들 첫 캠프활동도 잘 마무리 되었다. 아이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신공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에 갔던 아이들 고모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다. 이곳 생활이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이를 자축하는 기념으로 금요일 저녁, 소고기도 구워먹었다. 뭔가 행복한 금요일 저녁이었다. 아이들이 누나네 뒷뜰에서 노는 걸 보며 잠시 행복해 하기도 했다. 주말에 뭘 하며 놀까 궁리를 하며 그렇게 금요일 저녁을 보냈다.
토요일 새벽이었다. 간만에 찾은 여유 덕분에 달리기를 실컷 해보고 싶어 일찍 잠에서 깼다. 그런데 큰 아들이 내게 와서 배가 아프다고 했다. 웬만해서 아프다고 안하는 녀석인데 놀랍긴 했었다. 전날 저녁 속이 좀 안좋다고 했었기에, 그리고 요 며칠간 흥분해서 밥을 빨리 먹었던 것도 생각나서 그저 배탈이겠거니 싶었다. 화장실에 잘 다녀오라고 배를 몇 번 문지르고, 괜찮겠거니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간만에 10km를 넘게 달리며 상쾌한 기분까지 느끼며 그렇게 토요일 아침 길게 달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들에게 갔다. 괜찮을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아들은 여전히 아파해 했다. 왜이렇게 늦게 왔냐며 나를 타박하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한 시간 동안 나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별거 아닐거라 생각했다. 배탈은 예삿일이니까.
아들 속을 달래고자 숭늉을 끓여 먹이기도 하고, 매실 액기스도 먹이기도 했다. 아들은 토를 하면 괜찮을거라고 말하며 일부러 토를 하기도 했다. 제대로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토를 하긴 했었다.
토요일 내내 아파하던 아이는 일요일에도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을 가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곳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여전히 그냥 그저 그런 배탈일 거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하는 보리차도 끓여주고, 뒷마당에서 일광욕을 해주기도 했다. 배에 가스가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동네 약국에서 가스 빼는 약을 사와서 먹이기도 했다. 여전히 애는 배가 아프다고 했고, 계속 신경이 쓰였지만
그러다가 괜찮겠거니 싶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타지에서 병원을 간다는 것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가스가 나오는 약을 먹고, 얼마 후 아이는 배가 부글부글 끓는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가스 빼는 약을 먹은지 얼마 안되어 가스가 빠져나오는 소식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화장실에서 방귀를 뀌라고 했다. 나오라는 방귀는 나오지 않고 아이는 더 아파해하는 것 같았다. 괜히 가스 빼는 약을 먹였나 싶어 걱정도 됐다. 어린이용이 따로 없어서 어른용으로 양을 조절하여 먹였는데 그것 때문에 아픈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하기도 했다.
온갖 민간 요법을 다 썼다. 물론 근거 없는 민간요법이긴 했다. 내 생각에 몸에 괜찮을 것 같은 것들을 아이에게 해 주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몸도 좀 담그면 어떨까 싶어 아이 목욕도 시켜봤다. 다행히 아이는 목욕을 하고 몸이 한결 괜찮다고 했다. 여전히 아이가 크게 아프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월요일 아침, 아들은 결국 캠프에 가지 못했다. 둘째만 캠프에 보냈다. 큰 아들은 여전히 배가 아프다고 했다. 도저히 안되겠거니 싶어 둘째를 캠프에 보내고 나서 아들과 동네 클리닉에 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의원같은 곳이었다. 간단하게 진단 받고 약 처방을 받으면 괜찮아지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약을 먹고 나면 캠프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캠프 가방도 챙겨서 나왔다.
아이와 병원에 가는 것도 기념이라 생각해서 사진도 찍었다. 별거 아닐거라 생각해서 병원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얼마 안 기다린 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 분이 청바지를 입고 큰 헤드폰을 목에 두르고 우리에게 왔다. 사이비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는 아들을 눕히고 배를 만져봤다. 배를 눌렀다가 손을 떼는 순간 아들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더니 의사는 뭔가를 막 적으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안내를 했다. 그러면서 의심되는 병명을 내게 말해주었다.
" 어펜딕티스"
무슨 말인지 몰랐다. 스펠링을 하나 하나 물어봤다.
A.P.P.E.N.D.I.C.T.I.S
부랴 부랴 단어를 찾아봤다. 충수염이라고 나왔다. 흔히 말하는 맹장염이었다. 분명 아들은 오른쪽 아랫배가 아픈 것도 아니었고, 배가 아프다고 뒹굴뒹굴 구르지도 않았는데 맹장이라니 가당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상하게 생긴, 실력없는 의사의 오진일거라 생각했다.
분명 아들은 맹장에 걸렸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나왔다. 병원비 60불을 내고, 병원을 터벅 터벅 나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오진이 아니라 맹장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맹장 수술을 잘 할 수 있을까?
돈은 얼마나 드는거지?
1억 넘게 들면 어떻게 하지?
입원하게 되면 그동안 둘째는 어떻게 해야하지?
맹장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진이라 믿었지만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병원에 나와 아픈 아들을 끌고 주차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정말 하늘이 노랬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했다. 아내와 상의해보고 싶었지만 한국은 새벽 시간이었다. 괜히 아내까지 걱정하게 만들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그렇게 차까지 걸어왔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에게 좀 미안한 순간이었다. 아들은 아파서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서 있는데 나는 온갖 생각을 하며 아들에게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었다. 아들 아픈 것만 생각해도 모자란 판국에 나는 뭐가 그리 생각이 복잡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우선 아들부터 안심을 시켰다.
"오진일거야, 의사도 이상하게 생겼잖아. 그리고 맹장이면 엄청 아프다던데 그러지도 않았잖아. 괜찮을거야 얼른 병원가서 약 처방 받고 쉬자."
여전히 불안했고, 걱정이 됐지만 그렇게 맘을 먹기로 하고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수속을 밟았다. 클리닉 의사의 진단서를 보여주는데 대뜸 돈 이야기부터 들었다. 캐나다 사람도 아니고 보험도 없는 나였기에 그들에게 돈이 중요한 듯 싶었다. 응급실에서 의사 진료를 받는데 1,077달러가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만원 돈이었다. 너무 비싼 것 같았지만 대안이 딱히 없었다. 알겠다고 하고 그렇게 응급실에 아들과 함께 들어갔다.
아이를 응급실에 눕혔다. 그때부터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와서 아들 체온과 심장 박동수, 혈압을 체크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 와서 똑같은 일을 했다. 아들은 38도가 넘었다. 체온이 생각보다 높아서 놀랐었다. 배가 아프다고 했지 열이 난다고 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열까지 나니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아이 몸도 제대도 보지 못한 것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더니 혈액검사를 했다. 그리고 초음파 검사를 했다.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 걱정되는게 비용이었다. 다행히 응급실 비용에 초음파 비용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음파만 보면 맹장이 아닌게 확실해 질 거고 그러면 곧 처방을 받고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초음파 검사까지 다 했다. 그리고 의사가 왔다.
우선, 초음파 상으로는 맹장은 아니라는 이야길 들었다. 안심이 됐다. 하지만 의사는 초음파가 그럴 뿐 혈액의 백혈구 수치나 아이 체온, 그리고 배가 아픈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봤을 때 맹장이 맞는 것 같다는 소견을 우리에게 들려줬다. 그리고는 아이들 전문 병원으로 우리를 연결시켜 주었다. 어차피 맹장이라고 해도 자기네는 수술을 못하는 어린이라면서 아이들을 좀 더 잘 보는 어린이 병원에서 보는 게 낫다는 이야기였다.
뭐하는 시츄에이션이지 싶었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그냥 어린이 전문 병원으로 갔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물론 뭣도 모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린이 병원으로 가는 것도 기다려야했다. 어린이 전문 병원으로 아이를 옮기기 위해서는 앰뷸런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그냥 내가 데리고 가면 위험할 수 있어 안된다고 한다. 아이는 이미 수액을 맞고 있었고 진통제 주사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또 기다려야했다. 앰뷸런스가 오기까지를 말이다. 진통제를 맞은 아들은 약에 취한 건지 잠을 계속 잤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프며 뒹구는 것보다 차라리 낫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고 5시가 넘어서야 어린이 병원으로 아들은 갈 수 있었다. 아침 10시 조금 넘어 병원에 왔는데, 결국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말이다. 물론 이런 저런 검사를 했고, 수액을 맞혔고, 진통제도 놔 주었지만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는 아파해 했으니까.
어린이 전문병원에 도착했다. 아이를 응급실에 보내기 전 이런 저런 수속을 밟아야 했다. 우선은 비용에 대한 안내부터 받았다. 응급실 비용은 1,077불이고, 입원비는 하루당 5,000불이 넘으며 수술비는 4,000불이 넘는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걸 안내해준 직원은 이에 대해 동의한다는 싸인을 하라고 종용했다. 야속하기도 했다. 궁금한 것도 많았다. 몇 가지 물어봤는데 그 직원은 제대로 답을 해주지도 않았다. 마음에 안들었지만 지금으로선 대안이 없을 듯 싶었고, 빨리 아들을 치료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얼른 싸인을 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어린이 병원 응급실에서도 한참 누워 있었다. 간호사 몇 명이 왔다 갔다 했고, 인턴, 레지턴트들이 한명씩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의사로부터 최종적으로 맹장이 맞다는 결론을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맹장이 터저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초음파 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미 터져버릴 대로 터져버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항생제 수액을 놓아주었고, 균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항생제로 밤에 처방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수술을 하자는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아니 맹장이 터지면 위험한 건데 당장 수술을 하지 않고 또 기다리라고?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 말로는 괜찮을 거라고 오히려 항생제를 처방하고 있어서 다음날 수술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내가 반기를 들며 꼭 당장 수술을 해야한다고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리고 영어로 그렇게 따지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말이다.
결국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항생제만 처방 받은 채 아들과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갔다. 11시가 다 되어서야 말이다. 아침 9시에 동네 클리닉에 간 걸로 시작해서 14시간 동안 진통제와 항생제 그리고 수액을 맞고 수술도 하지 못한채 병실로 아들과 함께 올라가야 했다.
악몽같은 하루였다. 기왕 이리 된 거, 빨리 내일이 와서 수술을 했음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안아픈 게 훨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와 아들은 캐나다 어린이 전문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