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병원에서 나가야 합니다. 토요일이 아들 생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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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일요일 이틀동안 배가 아파 고생했던 아들은 월요일엔 하루 종일 병원을 돌아다녔다. 맹장이라고 판별받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리기만 해야 했다. 세번째 병원에서 다음날 수술을 하자는 확답을 받고, 결국 결국 11시가 다되어 병실로 갈 수 있었다. 병원비가 아까워 응급실에 더 있다가 12시가 지나서 병실로 가면 안되냐고 생떼도 부려봤지만 먹히진 않았다. 타국에서 아들이 아프니 아픈 아들이 걱정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지도 걱정되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맹장이 터진 아들은 누워있으면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안아픈건지, 안아프다고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버텨주는 아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아들은 진통제에 취해서 병실에 오자마자 깊게 잠이 들어 버렸다. 병실은 다행히 우리만 있었다. 2인실 병실이었는데 옆 침대는 비어 있었다. 2인실에 오는것도 사실 겁이 났었다. 여러명이 함께 쓰는 다인실을 원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다인실이 없다는 이야길 들었다. 1인실 아니면 2인실이었고, 어느 병실에 가나 비용은 같다는 이야길 들었다. 무엇을 결정하든 항상 돈이 먼저 생각나는 상황이 이래저래 우울했다
하루 내내 맹장이 아닐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이제 맹장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수술을 하면 좋겠다 싶었다. 더이상 수술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수술이 잘되어서 빨리 아픈 배가 낫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이가 잠이 들고 나니 배가 고팠다. 하루 종일 아들과 함께 있느라 나도 물 한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었다. 배가 고프단 생각이 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아들이 잘 자는 모습을 보니 허기가 졌다. 동물적 속성을 못 벗어난 걸까? 아니면 나의 부성애는 배고픔을 극복할만큼 대단하지 못한걸까? 쓰러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매형이 응급실에 와서 전해준 도시락을 꺼내 한 입 먹었다. 이미 식어버린 밥이었지만 그거라도 먹으며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밥을 먹는데 갑자기 서러워졌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왜 이런 곳에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고생을 시키고 있나 싶어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 혼자 즐겁게 살자고 휴직을 한 게 문제였을까? 휴직을 하고 나서 이것 저것 자유롭게 다닌 것에 대해 하늘이 경종을 울리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결국 휴직을 한 게 잘못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가자 마자 복직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돈도 걱정되었고.
한편으론 캐나다에서 내가 먹인 음식이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많이 먹으면 맹장이 터진다던데, 내가 조리하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빠뜨려서 그랬던 걸까? 내가 만든 음식이 비위생적이어서 그것이 문제가 된걸까? 돈 생각하지 않고 병원에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어땠을까? 백만가지 생각이 나를 사로 잡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내 탓이었다"
한없이 아들에게 미안했고, 아들이 잘 낫고 건강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줄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다 어느새 나도 잠이 들어버렸다. 역시 나는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 나약한 존재였다.
아침 7시 의사들의 회진이 있었다. 여러명의 의사들이 아들을 살펴 보았다. 맹장이 터졌다며 오늘 수술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몇시에 수술에 들어가느냐는 나의 질문에 의사들은 시간은 장담할 수 없다는 황당한 답을 내게 했다. 분명 전날 응급실에서 병실로 올라가기 전, 의사는 오늘 아침에 빨리 수술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었다. 이제와서 말이 바뀌니 화도 났다. 의사들은 수술 시간을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대한 시간을 당겨보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해 주었다. 전날 저녁 나에게 아침 수술을 약속했던 의사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의사는 나의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술하면 언제 퇴원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돈이 걱정되었기에 빨리 퇴원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달했다. 수술도 안한 상태에서 말도 안되는 질문이었고, 아들이 아파 죽겠는 상황에서 너무 속물같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5백만원 돈의 입원비를 내고 병실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의 건강만 걱정하세요"
나의 질문에 의사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수술 후 경과를 봐야겠지만 보통은 5일은 있어야 한다며 빨리 퇴원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나를 타박했다. 아이만 생각하라는 의사의 말에 뭔가 정곡을 찔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수술도 빨리 안시켜주면서 빤한 대답만 하는 의사가 얄밉기도 했다. 물론 얄미운 감정을 표출했다가 괜히 수술시간이 더 밀릴까봐 내색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의사들의 회진이 끝나고나서부터 나는 병동을 끊임없이 걸어다녔다. 그리고 만나는 의사, 간호사들을 붙잡고 언제 수술할 수 있냐고, 수술실에 확인 좀 해달라고 미친놈 처럼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제발 빨리 수술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 I beg you"
구걸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치며 다녔다. 수술을 빨리 해서 아들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빨리 수술을 해야 빨리 회복할 수 있고 그래야 퇴원도 빨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들 또한 수술이 빨리 안되는 상황에 답답해 하기도 했다. 언제 수술을 할 수 있는 거냐며, 왜 나는 캐나다에 와서 이렇게 병원에 있어야 하냐며 속상해 했다. 도대체 맹장은 무슨 기능을 하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까지 하기도 했다. 속상했지만 아들을 달래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뭐라 대답할 게 없었으니까.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그때부터는 과연 오늘 수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다음날 수술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불안해할 때 드디어 간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수술실이 잡혔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준비하고 수술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침대가 왔고 아들을 병실에서 이동 침대로 옮기고 수술실로 내려갔다.
"아프지 않아? 마취는 어떻게 해? 수술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아들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이런 저런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잠깐 자고 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긴 했지만 나 또한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수술실에 들어가기에 앞서 의사들이 와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마취담당의사와 수술 집도의사 그리고 회복실 간호사 등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들은 다행히 조금은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비록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못알아들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들은 혼자서 그렇게 수술실로 들어갔고, 나는 수술 대기실에 앉아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혼자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무섭지는 않을까 걱정 되었다. 말도 안통하는 이곳에서 혼자서 수술실로 들어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아들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의연하게 그렇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오히려 멀리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지 말자, 분명 잘 될거니까. 나약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아들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흘렀고 아들의 수술을 집도하신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맹장이 터져 버린 상태라 장기를 다 해집고 균들을 제거하느라 애를 썼지만 그래도 수술은 잘 되었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의사는 회진할 때의 의사들과 달리 우리의 사정을 들었다며 목요일 정도에 퇴원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자는 아주 따뜻한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마웠다. 수술을 더 빨리 해줬으면 더 고마웠겠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서 10분 정도 기다린 나는 간호사의 호출로 회복실에서 아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은 멍하니 회복실에서 나오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아직 마취가 덜 깬 듯 정신이 없어보였다.
"이제 안아플거야. 수술도 잘 되었다고 하니 얼른 회복하고 집에 가자"
아들에게 말을 건네 주었다. 아들은 정신 없이 티비를 볼 뿐이었다. 아들은 그렇게 회복실에서 몇 십분 멍때리며티비를 보다가 병실로 들어왔다. 병실에 들어와서는 그때부터 쭉 잠만 잤다. 이제 자고 나면 괜찮아질것이라는 생각에 나 또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아프다던 아이는 결국 화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수술을 마치고 마취약에 취해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간밤에 아들도 나도 깊게 잤다. 하지만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고통을 호소했다. 특히 소변을 위해 끼워놓은 관을 불편해 했고, 전날과 같이 배가 아프다는 사실에 짜증을 냈다. 수술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계속 아프니 속이 상한 듯 싶었다.
아들이 아픈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들의 수술은 단순히 맹장을 떼어내는 수술이 아니었다. 맹장을 떼어내면서 동시에 장기 곳곳에 퍼져버린 균을 제거해야 하는 수술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집으며 소독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장기들이 기존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하게 되었고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에서 배가 아파왔던 것이었다.
수술 후 아들은 수술전에 내지도 않던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소변을 걸러내기 위한 관을 떼어 내면서 아프다고 했고, 그 이후 첫번째 소변을 보면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걸을 때마다 배가 아파해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잘못하는 바람에 아이가 침대 옆 테이블에 머리를 찧었다. 그렇게 세게 찐 것도 아니었는데 아들은 짜증을 내며 울어 버렸다. 맹장이 터져 버린 상황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이였는데 수술이 끝나고 나서 오히려 아들은 더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아들이 그렇게 우니 나도 마음도 많이 좋진 않았다.
의사도 그렇고 간호사도 그렇고 지금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잘 걷는 게 최선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독한 마음으로 아들을 걷게 했다. 힘들다는 아들을 끌고 나와, 빨리 퇴원하려면 걷는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병동을 몇바퀴 돌렸다. 아들이 힘들어 할 수록 더 채찍질을 하며 빨리 집에가자고 종용했다.
식사도 시작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면 맹장 수술을 하고 방귀를 "뿡"하고 뀌면 그때부터 뭘 먹을 수 있다고 하던데, 여기에서는 그러진 않았다. 아이가 먹고 싶어하면 언제든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아이는 식욕도 없다며 뭘 먹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음식을 먹였다. 처음은 간단한 스프부터 먹였고 그 다음부터는 평소와 똑같은 음식을 먹였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이 병원밥으로 나왔다. 베이컨도 나오고 머핀도 나오고 이런 저런 음식들이 나왔고 나는 아들이 힘들어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것 저것을 많이 먹였다.
이곳 캐나다에서는 맹장 수술을 하고 나서 다음날 퇴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아들의 맹장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 아니었다. 맹장이 터져버렸기 때문에 나름 복잡한 수술이었다고 한다. 최소 5일은 입원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이야기 해주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5일 동안 있을 수 없었다. 너무 답답했고, 병원비 걱정도 컸다. 그리고 더 큰 이유가 있었다. 5일 동안 있게 되면 아들의 생일날 병원에서 있어야 했다. 아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생일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아들은 일년 내내 생일만 기다려왔는데 병원에서 우울하게 보내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을 보고 빨리 퇴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아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며 퇴원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레지던트들은 안된다고 강력히 부인하며 5일은 더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담당 의사는 좀 더 지켜보자는 유보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목요일 아침, 그러니까 수술을 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레지던트들이 아들의 상태를 보더니 항생제를 입으로 복용하고 토를 하거나 이상 증상이 없으면 오후에 퇴원을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아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퇴원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 기뻤다. 오후까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단서는 있었지만 어찌됐든 우중충하게 생일을 병원에서 보내지 않아도 되었고, 병원비를 하루라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후 의사 선생님의 최종 퇴원 허가를 얻기 위해서 아침부터 또 열심히 걸었다. 아들은 조금 힘들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결 가벼워보였다. 혼자 병동 한 바퀴를 쉬지 않고 돌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장기들이 제 자리를 찾느라 쥐어 짜는 듯한 아픔은 있었지만 그래도 수술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며 나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병동에서 걷다가 아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아들, 맹장 터져서 많이 속상하지?"
"응, 왜 하필 이렇게 난 운이 없는지 모르겠어. 여기까지 와서 맹장이 터질게 뭐야"
"그래도 이만한게 어디야 곧있으면 다 낫고 즐겁게 놀 수 있을거야"
"맞아, 그리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겠지? 더 좋은 일이 꼭 생길거야"
아픈 와중에 아들은 나에게 또 한번 감동을 주었다. 아들의 긍정적인 생각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들이 또 한뼘 자란 게 보였다. 엄마도 없이 말도 안통하는 의사와 간호사들 사이에서 아들은 더 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항생제를 복용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병원 관계자들에게 보여주었고, 병원에서는 저녁 7시가 다 되어 “드디어” 퇴원해도 좋다고 이야기 해 주엇다. 너무 기뻤다. 그런데 막상 나가도 좋다고 하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우겨서 병원에서 그냥 내보내주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아들이 너무 무리해서 퇴원하는 것이면 어떻게 하지 등등의 걱정이 한켠에서 작지만 올라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집으로 데려가서 내가 잘 보살피면 괜찮을 거 같다는 나만의 믿음도 있었다. 아들을 내가 잘 지켜내고 싶었다.
분명 나도 아들도 잘 이겨낼 수 있을거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박 4일동안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 누나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직은 아들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혹시나 모를 감염 때문에 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다. 우중충한 병원을 빨리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들도 나도 너무 좋았다.
아들은 퇴원 후 다음날부터 일광욕도 하고, 동네 산책도 하며 몸을 만들어 나갔다. 다행히 아들 기분도 꽤 좋아진 듯 했다. 그렇게 주말까지 지나면 많이 나아질 것 같았다. 씩씩하게 병을 이겨내는 아들이 참 듬직해 보였다.
그런데, 금요일 저녁 아들이 조금 이상했다. 조금 추워 했는데, 이불을 덮고 있는 아들의 머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체온을 재보니 37도가 조금 넘었다. 열번도 넘게 재봤다. 높을 땐 37.8도까지 올라가는 듯 했다. 열이 나면 문제가 있는 거라고 병원에 연락하라고 했는데 다시 걱정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37도는 괜찮다고 한 것 같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38도가 되면 응급실에 다시 갈 생각으로 아들을 계속 체크했다.
다시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무리해서 애를 빨리 퇴원을 시킨 것은 아니었나?
퇴원하자마자 빨리 나아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무리한 운동을 시켰나?
뭐가 됐든 다 내 잘못인 듯 싶었다. 아들의 열이 더 오르지 않기만을 바라며 기도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들아 더 아프지 말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