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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희망퇴직을 할 수 있을까?

조건이 좋아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by 최호진

희망퇴직 문서를 보면서


작년 연말 희망퇴직 문서가 떴습니다. "희망"하는 사람들에 한해 특별 퇴직금을 주는 조건으로 퇴직을 받는다는 문서였습니다. 특별 퇴직금으로 3년치 기본급에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비용까지 제공한다고 하니 조건이 나쁘진 않아 보였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 실물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한 덕에 그 돈을 받아 부동산이니 주식이니 투자를 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래도 그정도 퇴직금을 받고 퇴직할 수 있는 거라면 할 만 해 보였습니다. 충분한 여유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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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희망퇴직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회사를 사랑해서 정년까지 다니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희망퇴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전에 한 번 받았을 때에도 저의 나이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였던 터라 저를 회사에서 순순히 내보내줄리 만무했죠. 저도 당장 퇴사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복직을 할 때 분명 회사에서 제대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몇 년은 더 다녀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희망퇴직은 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저는 신청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청 대상자와의 차이가 아주 가까웠습니다. 80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을 뒀는데 저는 불과 5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어쩌면 다음번 문서가 떴을 때에는 저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한편으로 희망이 생기기도 하고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습니다. 과연 제가 희망퇴직을 할 수 있을 때가 됐을 때 과연 시원하게 사직서를 제출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텔스 모드


회사에 친한 선배와 희망퇴직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눴습니다. 선배 또한 저 못지 않게 기인한 분이셨습니다. 회사에서 인정도 받았고 일도 잘했지만 퇴사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퇴사가 꿈이었는지 씁쓸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 선배는 이번 희망퇴직 문서를 보고 꽤 우울해 하셨습니다. 자신은 희망퇴직 대상이지만 그 어떤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셨습니다. 고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고도 합니다. 선배는 다음번 기회가 왔을 때를 대비해 자격증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고민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며 말이죠.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 전 지인의 글에서 봤던 스텔스모드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스텔스 모드란 보이지 않는 전투기인 스텔스 폭격기처럼 회사를 다니면서 잠행하며 새로운 일을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른바 양다리 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쓴 장류진 작가나 작사가로 유명한 김이나 씨 모두 스텔스 모드로 새로운 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회사원인 상태에서 글을 쓰고 작사를 하면서 새로운 꿈을 꿨던 것인데요. 요즘같은 불확실성이 큰 시대에 하나에 전력을 투구하기 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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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선배에게도 스텔스 모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다양한 일들을 도모하면서 나의 가능성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어보였습니다. 회사라는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회사 일을 게을리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더이상 회사에 매몰되어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또한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도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재일 정치학자인 강상중 교수가 김지수 씨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회사에만 집중함으로써 스스로를 궁지에 내몰지 않으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나다움"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나의 일에 전부를 쏟아붓지 않는 것, 스스로를 궁지에 내몰지 않는 것이 중요하비다. '나다움'을 찾지 않고 직업의 안정성에 의존한 채 계급사회의 계단을 올라가면 엄청난 혼란에 빠질 거예요. 샐러리맨에 머물지 말고 농사, 자원봉사, 사회 공헌 등 다양한 스테이지에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사십시오. 그래야 후회가 없어요." <자기 인생의 철학자 중에서>


중요한 건 퇴사 자체가 아니다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 회사를 나가는 일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 회사 밖에서의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장 내년 또는 몇 년 후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받고 제가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저는 퇴사를 선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퇴사를 선택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런 저런 준비를 하면서 나 스스로 회사에만 매몰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제가 회사에서 더 자유롭게 제 의견을 내면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회사를 대충다니겠다는 말은 단연코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회사에서 당당해 질 수 있도록 저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며 지내고 싶습니다. 그게 복직을 하고 나서 조금 달라진 저의 마음가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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