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분에게 편하게 연락합니다.
퇴사 즈음해서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사장님께서 점심을 드시고 싶다고 날짜를 잡아 달라고 했다. 어리둥절했지만 퇴사 20일 후인, 지난 월요일 약속을 잡았고 시청 앞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몇 명 같이 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단 둘이 먹는 자리였다. 사장님께서 나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주신 것이다. 부담스럽게도!
사장님과는 친분이 있기는 했다. 그 인연은 지주에서 잠깐 근무할 때 시작됐다. 당시 지주 부서의 담당 임원이셨는데 40명도 채 안되는 조직이었기에 곧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셨었다. 당시는 코로나도 아니었으니 술 마실 기회가 잦았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승진하고 우리 회사로 넘어오시고 나도 지주에서 복귀를 하면서 다소 어려운 사이가 되었다. 오며가며 인사만 드릴 뿐이었다. 그러다 퇴사할 때 따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연락을 드렸는데, 점심 약속까지 잡게 되었다.
사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퇴사하며 직원들에게 올린 글을 사내 게시판에서 잘 보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응원해 주셨다. 그리고 나의 활동이 회사 사람들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주면 좋겠다는 덕담도 해주셨다. 본인을 어려워 하지 말라며 자주 연락도 하라는 당부도 하셨다. 덕분에 한시간 넘게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 전 가졌던 부담스러운 감정은 감사하다는 감정으로 금세 치환되었다.
<퇴사하면서 회사에 올린 공지글은 브런치에도 올렸습니다>
https://brunch.co.kr/@tham2000/306
사장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약간의 불손한 목적도 있었다. 최근 책이 나온 것에 대해서도 알려드리고 사장님께서 "많이" 사주시기를 바랐다. 그래서 책도 들고 갔는데 홍보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많이 사서 직원들께 뿌려 달라는 소리를 아주 작게 했는데, 잘 읽어보겠다는 말씀만 주실 뿐이었다. 결국 불손한 목적에 대해서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진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17년간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는 현시점, 어떤 것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휴직을 했을 때는 일부러 회사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아 불안했다. 회사 쪽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나 스스로를 돌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퇴사를 하면서도 비슷한 마음이었는데 사장님과 식사를 마치면서 회사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게 오히려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퇴사한 만큼 그들과의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고. (다만 회사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은 우선 경계하고 싶다)
그리고 연락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면 무조건 해야 한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장님께 퇴사 하는날 연락을 드리면서 고민이 많았다. 상대방이 좋아하지도 않을텐데 굳이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찌됐든 책 판매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용기를 냈다. 하지만 흔쾌히 받아주셨고 맛있는 밥에 좋은 기운까지 얻었다. 사장님은 오히려 연락이 고마우셨다고 했다. 할까 말까라는 고민이 든다면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번 계기로 다시 다짐할 수 있었다. 할까 말까 고민이라면 꼭 해야겠다고.
물론 이번에 반성도 했다. 상대방을 바라는 마음으로 연락하는 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하고 나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듯 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또 같이 밥먹고 싶어, 아니면 배우고 싶어서, 라는 마음이 든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싶다. 결국 그런게 또 좋은 계기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너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까라는 고민을 하진 않아야 될 듯 싶다. 인생 피곤해지니까.
퇴사를 한 지 아직 3주밖에 안 되어 정신을 못차리는 중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후다닥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물론 내가 시간 관리를 잘 못해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퇴사하고 뭐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할 따름이다.
바쁜 과정에서도 진짜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특히 이번에 사장님과 식사를 한 자리가 그랬다. 특히 내 17년을 함께 했던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소중했던 사람들이니만큼 뭔가를 바라기 보다는 그저 좋은 사이로 인연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좋은 분들께 "그냥" 연락해 봐야겠다. 내가 퇴사했다는 기쁜 소식도 알릴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