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규 시집 - <날 두고 가라>
이른 아침,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시인의 목소리. 분주한 손길을 멈추고 잠시 꼼짝 않고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박덕규 시집 <날 두고 가라> 중 ‘인간의 집’이 낭송된 것.
모호한 말로 시를 쓰는 것도 인간이고
그걸 해독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것도 인간이다.
그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인간이고
기도문을 모아 책을 내는 것도 인간이다.
이런 얘기를 다시 시라고 쓰고 있는 것도 인간이다.
내 유언은 이렇다.
--사리를 찾으려고 뼈를 들쑤시지 마라.
이 말이 무슨 뜻인가를 두고
고개를 갸웃하다 말다 하는 것도 인간일 거다.
이렇게 말이 끝없이 이어져야 인간인 거다.
죽을 수 없어 인간인 거고 죽어야 인간인 거다.
말을 쌓아야 인간인 거다.
말이 쌓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인간인 거고
말을 새긴 바위 앞에 서서
잠시라도 고개 숙여야 인간인 거다.
너의 입술에서 떨어진 꽃잎 위에 집을 짓고
거기 내가 산다.
- 박덕규, <날 두고 가라>, ‘인간의 집’, 곰곰나루
다시 곱씹는다. 비우고 채우고 다시 비우는 과정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어떤 수식이나 기교도 없는 시. 담담히 읊조리는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하릴없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하릴없는 말 앞에서 하릴없이 말을 걸고 마음을 거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적인 것. 시적인 것. 말의 하릴없음. 그 하릴없음을 사랑하는 존재의 하릴없음. 그렇게 시인은 거기 산다. 하릴없이.
(2019-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