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 벤야민과 산책자의 사유
책 읽기는 나그네처럼
언제부터인가 나의 책 읽기 패턴은, 어떤 책 한 권을 완독하겠다,라는 ‘완료 지향’보다는, 어떤 책으로부터 내게 필요한 자양분을 깊숙이 흡수하겠다,라는 ‘섭취 지향’에 가까워졌다. ‘다시 읽기’나 ‘부분 읽기’가 그것이다.
‘다시 읽기’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렇다. 이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 기존에 갖지 못한 시야와 통찰을 얻으리라,는 식의 야심 찬 기대를 품기보다는, 이전에 내가 감응한 흔적들(밑줄, 메모 혹은 포스트잇을 붙여놓거나 한쪽 귀퉁이를 접어놓은 페이지)을 주로 살펴보며 그때와 지금의 차이 혹은 사고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안도하거나 절망하는 놀이를 자처하는 쪽에 가깝다.
‘부분 읽기’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나의 습성과도 관련이 있다. 한 번에 한 권의 책을 완독하는 것보다 서너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경우가 더 많다. 서로 연결된 주제일 때도 있고, 분야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경우도 있다. 그때그때 나의 필요와 정서에 따라 내키는 대로 번갈아 읽는다. 물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한꺼번에 여러 권의 책들이 출몰하여 집안 곳곳에 뒹군다는 점, 부분 읽기가 또 다른 책의 부분 읽기를 더 쉽게 낳아 (마치 관광용 ‘hop-on hop-off’ 버스처럼) 점점 더 책 사이의 승하차가 제멋대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이다. 자유로운 승하차의 단점은 산만해지기 쉽다는 것, 즉흥성을 띤다는 것, 당최 오늘 내에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거나 즐기겠다는 촘촘한 계획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 등이다. 말 그대로 발길 닿는 대로, 무계획이 계획인 그런 여행자의 패턴인 셈이다.
나그네 스타일의 독서라 해야 할까. 시적시적 구경하듯 다니다가 때로는 한 곳에 느긋하게 머물며 풍경을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감전이라도 된 듯 사랑에 빠져 두문불출인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도 또 훌훌 털어내고 다음 여정을 위해 떠나는 나그네. 나그네는 목적한 곳이 없다. 그러나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길을 떠난다. 이런 식의 책 읽기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어떤 책을 언제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에 구속되지 않는다.
행간을 산책하듯
나그네가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는 매력적인 장소를 만났을 때이다. 좀더 알고 싶고 좀더 음미하고 싶은 풍경을 만났을 때이다. 발걸음은 느려진다.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공간을 탐색한다. 좀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세밀히 관찰하고 싶다. 책도 마찬가지. 이런 책들은 마치 행간을 산책하듯 읽는다. 느리게 읽고 자주 멈춘다. 당장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나를 멈추게 한다. 금세 날아가버릴 것을 알기에 다급하게나마 행간이나 페이지 여백에 그것들을 적어놓는다. 다시 보게 되리라는 기약은 없다. 중요한 것은 멈추고 싶을 때 일단 멈춰 서는 것, 적고자 하는 내적 충동을 즉석에서 해소하는 쾌감에 있다. (쾌감이라 해야 할지 쾌락이라 해야 할지.) 문장들 혹은 단락들 앞에서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린다. 짧게 끊어지는 메모가 될지, 긴 호흡으로 적어야 할 노트가 될지. 전자는 책의 여백에, 후자는 컴퓨터 메모장에 남는다.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이럴 땐 서평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 마음에 바싹 다가앉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되짚듯 필사하며 그 행간에 나의 생각들을 풀어놓고 싶다. 번역가이자 작가인 故 이윤기 선생은 글쓰기에 관한 산문집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읽는 일은 그 행간에다 우리의 사유를 풀어놓는 일이다."
산책자의 사유
산책자의 사유,는 익숙한 개념이다. 벤야민이 그랬고, 보들레르가 그랬고, 무수히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그랬다.
산책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태도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의미심장한 상을 놓치지 않는 '정신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 윤미애,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문학동네, 2020, 12쪽
행간에서 느리게 산책하기,가 독서의 자세라면, 기록하지 않으면 읽었다고 볼 수 없다,가 독서 후의 태도이다. 읽는 것이 자극,이라면 쓰는 것은 반응,이므로. 오래도록 자극을 찾아헤매다 자극이 아닌 반응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잘 반응하려면 좋은 자극이 필요하고, 잘 쓰려면 좋은 읽기가 필요하다는 진리.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텍스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일종의 강박이 된다. 일상언어에 오염된 나의 말이 별다른 성찰 없이 통념과 상투적 표현을 쏟아낼 것을 경계한다.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다르게 말할 수도 없을 때, 나의 침묵은 길어진다.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지난 8년간 적게 읽었다고 볼 수도 없다. 독서 후 침묵을 요구한 많은 책들을 생각해본다. 책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탁월한 텍스트에 조응할 만한 정교한 언어가 내겐 부족했다(혹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극의 강도에 감응할 만한 나의 반응 언어의 창고가 빈곤한 탓이랄까. 다수의 고전이나 철학서, 소설과 시들이 그렇게 미끄러져 갔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책들은 기록과 함께 남았다. 담고 싶은 문장들을 무턱대고 옮겨적다가 불현듯 촉발된 생각을 받아적은 운 좋은 경우이다. 쓰면서 생각하기. 이는 걸으면서 생각하기,와 유사하다.
그(벤야민)가 ‘걸으면서 생각하기’라는 사유법을 택하게 된 곳, 파리는 이미 산책자의 도시로 유명했다. 보들레르가 19세기의 대표적인 산책자 시인인 이유는, 그가 파리의 풍경을 묘사해서가 아니라 거리를 걷다 떠오르는 즉흥적 시상과 낱말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일방통행로>의 저자(벤야민)도 거리의 구경꾼이 아니라, 거리를 산책하다가 불현듯 찾아온 생각을 기록하는 자다. 그것은 전통적 형태의 책과 달리, 거리에 의해 텍스트 내용이 결정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다. (같은 책)
이 책의 저자는 위 글에 해당되는 각주에 ‘텍스트-거리’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썼다. 이는 책읽기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특정 지역을 돌아본 후(=책을 완독한 후) 전체적인 조망과 관점으로 나만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 내가 당장 걷고 있는 거리(=문장 혹은 행간)를 텍스트 삼아 무언가를 적는 것이다.
행간을 산책한다. 느리게 걷다가, 마주친 문장에 의해 촉발된 생각을 하릴없이 이어간다.
해외로 이주한 후 다시 한국에 정착한 지금까지 여덟 해가 지났다. 돌이켜보니, 느리고 긴 호흡으로 산책하듯 책을 기록한 글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시기에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고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던 때. 그러나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때. (최악일 때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몇 년간 띄엄띄엄 이어온 느리고 긴 산책 기록을 묶어본다. 다시 읽어보면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 장황하고 두서없는 과거의 기록을 털고 새로운 산책을 나서야 할 때인 것 같다.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