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봄

이제니의 시 '갈색의 책'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 '갈색의 책' 중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있다. 많지 않더라도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나를 온전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나'도 있다. 내 안의 여러 '나-들'이 포함된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이다.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여러 '나-들' 중 하나가 전체의 나를 대변한다. 조금씩 변주되는 '나-들'이 타인과 제각기 만나 '나'라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생성한다. 이미지들은 서로 충돌하고 상쇄하며 보완하기도 한다. 그러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눈 밝은 누군가를 기다린다. 가망 없는 일인 걸 안다.


내 안의 무수한 '화자들'이 두서없이 '나'를 자처하고 나설 때 '나'라는 책은 너덜너덜해진다. 표지도 없고 제목도 없는 책. 무명의, 아무것도 아닌 내게 스스로 이름 붙여주려는 행위를 문학의 한 방편 혹은 선행작업이라 착각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는 책을 읽어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나를 읽고 타인을 읽는 것이 합당한 순서라고 여겼기에.


소설가 이청준은 "문학이란 해독이 안 되는 것에다, 남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빛을 부여하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번역가 이윤기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다 이름을 지어붙이는 행위가 문학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나 자신을 해독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설정한다면, 나 자신에 이름 붙여주는 것이 문학의 제스처가 될 수 있다고 믿을 만도 하다. 과연 그럴까. 이윤기의 말을 좀더 인용해보자. 생각은 다시 전복된다.


문학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지 ‘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학문은 나날이 쌓아야 하고, 도는 나날이 비워야 하듯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다 지어 붙이는 이름은 나날이 늘려야 하고 ‘제 이름’에 붙는 이름은 나날이 지워가야 하는 것이다. 남의 얼굴 보고 이름을 지어야지 제 얼굴 보고 이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이윤기,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중에서


나를 읽겠다고 무슨 말이든 해온 시간들을 돌아본다. 나는 제 얼굴을 보며 이름 붙이는 나날만 쌓아온 것은 아닐까.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라는 말처럼, 나는 좀 나아졌는가? 누군가 그랬다. 글쓰기엔 두 가지가 있다고. 치유의 글쓰기 그리고 창작으로서의 글쓰기. 아무 말이나 해왔기에 나는 좀 나아졌다,고 느낀다. 무엇이? 기분이? 굳이 치유,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치유가 목적은 아니었으므로. 깨닫는다. 내게 글쓰기는 치유가 아니었다. 나는 치유를 목적으로 삼을 만큼 상처 투성이의 인간도 못 된다. 결과로서의 치유만 말할 수 있을 뿐.


무엇이 나아졌을까. 다시 깨닫는다. 나아진 것은 없다. 문장은 계속 맴돌고 있다. 제자리걸음.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같은 자리로 계속 돌아오는 상태. 독일어로 '링반데룽'이라 불린다. '링반데룽'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있다. 언젠가 시인 K에게 망설이며 보여주었을 때, 그는 '끊임없이 쓰고자 하는 이의 자의식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그리고 희미한 희망의 말을 던졌다. 좀처럼 '좋다'는 말을 하지 않는 그가 '좋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도 좋은데......좀더 자유롭게 썼으면 좋겠다." 나의 시가 백은선과 신해욱을 연상시킨다고도 했다. 이 말은 약일까 독일까.


또 다른 시인 K는 이렇게 말했다. 뒤돌아봤을 때 내가 쓴 것들이 형편없게 느껴진다면 그나마 발전한 것이라고. 과거의 글(혹은 시)들이 참담하게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아졌다고 느낄 수 있는 정황이나 단서는 찾을 수 없다. 이제니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나아지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라는 말이 새삼 다가오는 이유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이제 진부하게까지 느껴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단지 '침묵'에만 방점을 찍어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한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논고>가 가진 취약성과 오류를 인정한 것처럼.


말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어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대개 시인 아니면 소설가들. 문장으로 시작해서 문장으로 끝나고 싶은 사람들. 자주 침묵해왔지만 침묵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침묵 뒤의 발화는 그간의 침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글을 쓰겠다는, 쓰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를 쓰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이경림 시인이 질문했다. “절망이 없는데 어떻게 시를 쓰지?”

그리고 자답했다. “절망이 없는 시를 쓰면 되지.”


절망이 없으면 절망이 없는 문장을 쓰면 되고, 희망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문장을 쓰면 된다. 그뿐이다.


(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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