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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시련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나요?

[프롤로그]

by 가은이 아빠


2024년 11월 5일. 아직도 나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살던 이 세상이 무너진 날.


내 보물 가은 공주.


이제 겨우 두 돌이 채 안 된 내 딸에게 ‘암’이라는 무서운 병명이 내려진 날.


묘한 침묵 속 의사 입에서 '암이 맞습니다'라고 확진 판정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핑 돌기 시작하는 내 눈물을 우리 딸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르게 아빠를 슬프게 했다는 죄책감의 무게가 우리 꼬맹이에게 갈까 봐 두려웠다.


낯선 대학병원에서 힘겨워하던 가은이는 다행히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룸미러 너머로 우리 딸이 잠든 걸 확인했고, 드디어 나에게 마음껏 울 권리가 생긴 것 같았다. 그제야 현실이 나를 조금씩 덮쳐왔고, 빨간불의 신호등 아래 나는 운전대를 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장마처럼 쏟아지던 눈물.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앞이 캄캄했고, 가슴이 찢어졌다. 슬픔에 빠져 눈물범벅으로 운전하던 찰나, 순간 앞차와 접촉사고가 날뻔했다.


아차! 그 순간, 나는 감정에 잠식되어 오히려 내 딸을 위험하게 하고 있다는 깨달았다. “정신 차려! 우리 가은이 잘 치료받아서 이 세상이 따듯하고 살만한 곳임을 보여주자.” 그리고 내 짝꿍 와이프와 함께, 우리의 삶을 따듯함으로 채워 이겨내겠다고 내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도망가고 싶다’는 순간이 온다. 내게 그날이 바로 그랬다. 사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그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아빠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다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을, 그날 나는 가슴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문제는, 이미 나는 너무 복잡한 세상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는 거다. 가장, 남편, 아빠, 아들, 장남, 사위, 동생, 팀원, 선배, 후배, 예비 주재원, 친구, 주주... 내 이름 앞에 붙은 모든 역할들이 어느새 나를 옥죄고 있었다.


잘 살고 싶었기에,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왔기에, 삶은 더 무겁고 숨 가쁘게 느껴졌다.


암 확진받고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로 2달간 병원-직장의 구조로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내 에너지는 점점 바닥나고 있었고, 무엇보다 환자를 희망으로 이끌어야 할 보호자는 피해의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을 증오하며 어느새 냉소해져 버린 아버지가, 주삿바늘의 공포를 알아버린 딸을 따뜻하게 품어주기엔 버거웠다. 그래서 나는 13년간 쉼 없이 달려온 회사 커리어에 조용한 쉼표하나를 찍고, 가은이의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9개월간의 치열한 투병 기간 동안, 아이 치료에 전념하며 조금씩 내 삶을 돌아보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세상이 끊임없이 나에게 알려줬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좋은 직장'에 입사해서, '좋은 배우자' 만나, 애기 놓고 살아야 대한민국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이 말이 진리인 것 마냥 받아들인 나에게, 어느새 세상은 너무나 매정하고 차가웠다. 근데 과연 이 세상이 차가워져 나를 버린 것이었을까?


이 글은 처음으로 정신없이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며, 살짝 놓아버린 내 인생의 운전대를 다시 찾아가는 나의 기록이다.


대한민국에서,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을 좇아 미친 듯이 경쟁하며 살아온 이들의 아픔과 고뇌를 나는 잘 안다.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점점 지치고 속상한 이 세상의 수많은 아빠, 엄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혹시라도 당신이 멈추고 싶은 순간을 살아가는 중이라면, 우리 가족의 투병 이야기가 작은 쉼이 되길, 그리고 당신도 그 휴식을 통해 얼른 웃으며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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