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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이 하나 있다. ‘웬만한 물건은 반영구적인 거 아니야’ 병이다. 용도가 무어든 다이소 같은 곳에서 천 원짜리 물건 하나만 사도 최소한 몇 년은 써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하는 병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너는 물건을 ‘정’하게 쓴다고. 아마 정은 바를 정正을 뜻하는 한자일 것이다. 즉, 물건을 바르게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실제 성격이 그랬는지 한 두어 번 그런 행동에 의해 칭찬을 받고 좋아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삶을 돌아보면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닌 거 같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고 다녔음에도 물건을 딱 한 번, 딱 하나 잃어버린 걸 제외하면 없다. 또한 술을 꽐라가 되도록 마셔도 집에 오면 항상 옷을 갈아입고 갈아입은 옷조차 대충 집어던지지 않고 겔 건 게고 빨래 통에 넣을 건 넣고 씻고 잤다.
군대에 가서도 선임들이 쓰던 장구류 등을 물려받을 때도 적당히 후줄근한 걸 선택해도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물건을 선택한 동기들보다 오히려 깨끗하게 더 오래 쓰는 편이었다. 이전에 이와 관련한 글을 쓴 적도 있는데 이런 예는 너무나 많다.
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집이 못 살았기 때문에 물건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싼 건 싼 맛으로 가성비를 뽑기 위해 아껴 썼고 가끔 필요에 의해 사게 되는 비싼 물건은 비쌌기 때문에 이를 꽉 깨물고 아껴 썼다. 정장 입는 걸 좋아하는데 정장 바지 구겨지는 게 싫어서 정장을 입으면 거의 서 있는 편이다. 일단 깔끔해 보여야 하는 정장 바지가 구겨져 있는 게 싫었고 구겨진 바지를 펴기 위해 다림질이나 드라이 등을 자주 하게 되면 옷은 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장을 입는 날은 그야말로 꼿꼿하게 서 있게 된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물건을 어지간히 쓰지 않고는 못 베기는 성격이 됐다. 즉, 이 정도 물건은 이 정도 기간은 버텨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나만의 사용기한이란 게 생겼다. 특별한 기준은 없다. 부서지거나 해질 때까지 쓰는 거다. 지금 옆에 있는 마우스는 6년 전에 노트북을 살 때 직원을 졸라서 받은 만 원도 안 하는 싸구려인데 아직 쓰고 있다. 이제 클릭이 잘 안 돼서 바꿔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마 바꾸기 전에 노트북 키패드에 있는 마우스패드에 익숙해질 거 같다.
그래서 물건을 오래 쓴다. 그런데 최근 이런 성향에 의해 정말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당시엔 모르고 넘어갔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더 아찔한 건 나 혼자 몸이면 뭐 이미 지나갔고 별일 없었으니 됐어 이랬겠지만 아내와 딸이 함께 했기에 그냥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지금 끌고 있는 차는 내년 여름이면 10년이 된다. 10년 동안 타이어를 이번 주에 교환한 거 까지 하면 4번 교환했다. 전륜구동인 차라 처음에 앞 타이어만 교환을 했고 두 번째, 세 번째도 계속 앞 타이어만 교환을 했다. 첫 번째 교환할 때부터 뒤 타이어까지 전부 다 바꾸세요 하는 권유를 받았지만 네네 일단 앞 타이어만 바꿔 주세요 하고 넘겼다.
참고로 이전에 처음 끌었던 차는 9년 동안 타이어를 한 번 갈았다. 그때 타이어를 갈 때 타이어 가게 사장님이 타이어 상태를 보고 홈이 하나도 없이 깨끗한 모습을 보고 레이서여? 이러다 죽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도 네네 하고 그냥 웃고 말았다. 그때는 혼자였기 때문에 그냥 웃고 넘길 수 있었다.
먼저 끌던 차의 경험과 혼자가 아닌 상황이란 점을 감안해 이번 차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타이어를 자주 갈아 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주에 사실 타이어를 갈려고 한 건 아니다. 주행 중에 타이어를 확인하라는 경고등이 떴는데 가끔 일시적인 오류가 나는 경우도 있어 별스럽지 않게 리셋 버튼을 눌러 경고등을 껐다.
하룬가 이틀이 지나 다시 경고등이 떠서 어! 못이 박혔나 하면서 봐서 보험회사 긴급출동 부르지 뭐 하고 일을 보러 들어갔다. 두 시간 남짓 일을 보고 나왔더니 오른쪽 앞 타이어가 바람이 거의 다 빠져 주저앉아 있었다. 아... 기어이... 귀찮게... 별 수 없이 긴급출동을 불렀다. 대충 10~30분 기다리다 아저씨가 오셔서 확인하고 지렁이 박아주면 공기압 좀 전체적으로 봐주세요 하고 넘기면 되니까 하는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 긴급출동 아저씨가 오셨고 너무 흔한 상황이었기에 아저씨는 거의 기계처럼 착착 일을 진행했다. 우선 바람을 넣고 바람이 어디서 새는지 확인을 하기로 했다. 바람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서 주저앉았던 바퀴가 서서히 올라왔다. 어디에 못이 박혔으려나 기대 아닌 기대를 하면서 지켜봤는데 순간 ‘쉭~’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다시 빠지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어! 이거 철사가 나왔네, 이거 안 돼요. 갈아야 돼요.’하는 현실이 아닌 영화 같은 대사를 치셨다. 아... 생각지 못한 상황, 타이어 간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그리고 깨질 돈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깨트리려고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시간도 늦어 내가 주로 가는 정비소는 문을 닫아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안 그래도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는 상황에서 어쩌면 재수 없으면 눈탱이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걱정까지 앞서 짜증이 이만저만 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어는 이미 맛탱이가 가서 이거 뭐 어떻게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긴급출동으로 오신 아저씨는 착한 분이셨고 인근에 본인이 아는 타이어 가게로 연결해 주셨는데 가격을 들으니 내가 생각하는 가격 범위에 들어오는 가격을 제시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으로 30여 분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차를 견인차에 매달고 타이어 가게로 갔다.
타이어 가게로 가면서 아... 이거 어쩌면 뒤 타이어도 갈아야 할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타이어 가게에 도착해서 일단은 처음 이야기한 대로 앞 타이어만 갈기 위해 준비를 했다. 긴급출동 아저씨는 가시고 타이어 가게 사장님이 열심히 이리저리 뛰면서 앞바퀴를 풀고 작업을 시작하시려다 ‘저 뒷바퀴 타이어도 10년 됐는데 가시는 게...’하는 너무나도 예상되는 이야기를 하셨다. ‘네 저 그 그게... 갈아 주세요’
긴급출동 아저씨나 타이어 가게 사장님은 명백하게 나에게 필요한 조치만 정확하게 처치해 주셨다. 그리고 정말 뭐랄까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먹고자 하는 장사꾼의 마음이 아닌 걱정되는 마음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뒷바퀴 타이어 교체를 권했다. 아니 뭐 백번 양보해 그 양반들이 호구 잡겠다고 나를 살살 꼬신 거라고 해도 이건 상황 자체가 그 꼬임에 넘어가는 게 맞았다.
앞 타이어에 가볍게 못이 박힌 게 아니라 철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갈리게 탄 상황이었다. 더해서 아직 별 문제는 없었지만 뒤 타이어는 9년을 넘게 갈리고 있었다. 웬만한 물건은 반영구적인 거 아니야 병이 심해져 죽을 뻔했다. 나 혼자 그랬다면 아마 또 적당히 웃어넘기며 앞 타이어만 바꿔 주세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열흘 전에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제부도를 다녀왔었다. 고속도로를 탔다는 이야기다. 차를 고속으로 달렸다는 소리고 근 300여 킬로미터를 이동했다는 이야기다. 결과론적으로 운이 좋게 그때까지는 버텨줬고 그렇게 다녀오고 나서 명을 다한 타이어가 너무 고마운 상황이지만 자칫 조금 더 멀리 갔거나 조금 더 빨리 달렸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병은 고치는 게 맞다. 심하면 극약처방도 필요하다. 명백히 소모품인데도 불구하고 영구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가격, 돈 때문이다. 돈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놈을 쉽게 이기기는 어렵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이제는 이겨야 할 때인 거 같다. 다른 건 몰라도 가족의 안전과 직결되는 물건은 영구적인 게 아니야 처방으로 돈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