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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26. 2024

김여사

7월.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이다. 윤은 일주일째 카페에 오지 않는다. 연락도 없다. 더러 이런 일이 있다. 지는 그러려니 했다. 윤은 마음이 편치 않으면 어딘가로 숨었다. 그러다 심란하게 얽힌 마음의 실타래가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타났다. 윤과 가까워지려면 예고 없이 출렁거리는 마음의 시간을 기다려줘야 한다.  


지는 윤을 처음 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9년 4월 19일. 4.19 기념집회와 마라톤으로 대학가 주변이 들썩이던 날이었다. 늦게까지 독서실에서 사법 시험 준비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 지는 골목 어귀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선영과 윤을 만났다. 술 냄새 땀 냄새 담배 냄새 온갖 냄새가 뒤섞여 진동하고 있었다. 선배들을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뒤풀이 술자리까지 하고 돌아오는 행색이었다. 그런데 살짝 불어오는 한밤의 봄바람에 실려 불쾌한 냄새 속에서 꽃향기가 났다. 자잘한 꽃무늬가 가득한 아이 보리 색 원피스, 연 노란색의 카디건, 반짝거리는 흰색 단화. 어깨에 매달린 자그마한 핸드백. 노란 프리지어 한 단을 꼭 쥐고 있던 가느다란 손. 윤은 봄날 설레는 맘으로 처음 데이트하러 가는 아직은 수줍은 아가씨 같았다. 자신이 보낸 하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 윤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90도로 몸을 접어 인사를 하며 G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영이 오빠. 제가 원래 아무한테도 오빠라고 안 하는 데 특별히 선영이 오빠라서 오빠라고 불러드리는 거예요. 이건 첫 방문 기념 선물! 예쁘죠? 그런데 오늘같이 아름다운 봄날을 이렇게 보내다니 너무 슬퍼요”


그리고서 윤은 G에게 업혀 집에 와 다음 날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젊은 날의 윤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심성이 따뜻했다. 자주 감정이 널뛰었다. 종종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윤은 G와 선영의 자취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대개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선영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그러다 며칠씩 발걸음도 하지 않는 날이 있었다.


“윤이 참수 탔어. 이유는 몰라. 내버려 두면 돼. 며칠 있으면 해맑게 나타나 그간 어땠는 물어보지 않아도 다 불어. 나니까 받아주지. 망할 년.”


선영은 윤에게는 늘 관대했다.


어느 날은 뜬금없이 새벽 꽃 시장에 다녀왔다며 안개꽃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나 일부러 아침상을 차리게 했다. 그날 지방 자취생의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밥상에는 윤이 맥주잔에 꽂은 안개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공휴일에는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이면 뻥튀기와 만화책을 한 아름 안고 오기도 했다. 비디오를 잔뜩 빌려와 밤새 선영과 뒹굴었고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밤새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잘 울었고 또 잘 웃었다. 

직선적이고 감정 표현이 별로 없는 선영은 모든 걸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조언과 도움을 구하는 윤을 좋아했다. 선영은 자신이 윤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것이 기쁨이자 보람인 듯했다. G는 선영이 윤을 상대로 언니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은 기 센 선영에게 대 놓고 싫은 소리를 하거나 낯간지러운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G는 그런 윤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윤이 카페에 오지 않자 G의 일상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낮 시간에는 지하에 내려갈 수가 없다. 저녁은 카페에서 대충 챙겨 먹었다. 간혹 처음 오는 사람들은 손님 응대를 제대로 하지 않는 말 못 하는 주인장에 놀라 그냥 돌아갔다. 하지만 G는 윤이 다시 카페에 나와 예전에 하던 일들을 해줬으면 하는 맘은 없었다. 어차피 카페는 윤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익숙하게 돌아간다. G는 윤이 어서 헝클어진 마음을 수습했으면 했다.      


비가 오니 손님이 별로 없다. 지는 방금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한 커피 향과 쓰고 신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심히 출입문을 쳐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허리를 돌리고 팔을 위로 쓱 뻗어 옆구리를 늘렸다. 허리를 굽혀 무릎 돌리기를 10번 정도 했다. 가볍게 손발을 털어주었다. 몸이 훈훈해지자 남은 커피를 마셨다. 

빗줄기는 오후가 되자 더욱 굵어지고 천둥 번개까지 쳤다. 손님은 없다. 지는 한가롭게 음악을 듣고 유자차를 끓여 마셨다. 식물도감을 펼쳤다. 지는 요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의 가슴에서 꽃이 피고 식물이 자라나는 걸 자주 본다.  그래서 꽃과 식물에 관심이 많이 갔다. 세상에 수많은 꽃과 식물이 아름답게 존재함이 경이로웠다. 

저녁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그쳤다. G는 냉장고에서 베이글을 하나 꺼내 반으로 잘랐다. 미니 오븐에 살짝 구워 치즈 크림을 발라 먹었다. 바삭하고 고소하다. 첫 끼니를 일찍 마친 날은 빵이나 떡으로 간식을 먹곤 한다. 

“짤랑”

김 여사다. 윤은 카페 단골인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근처에 사는 60대 초반의 가정주부. 거의 매일 산책하듯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어쩌다 친구를 데려올 때도 있다.


“오늘도 혼자시네요. 강 선생 좀 나오라 그러세요. 요 며칠 얼굴 안 보이니 보고 싶어요. 무슨 일 있나 걱정되네.”


김 여사는 친절하고 이야기 잘 들어주는 윤을 좋아한다. 자신이 윤하고 꽤 친하다고 믿고 있다. 옅게 화장하고 단정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고급스러운 회색 모직 숄을 걸친 매무새가 꽤 세련됐다. 항상 우아하고 교양 있는 모습이다. 꾸며서라기보다 절제된 격식이 옷차림과 몸에 배어 있었다. 윤은 그녀가 태생이 부잣집 귀부인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검사님 혼자 심심하시겠어요.”


같은 동네에 사는 김 여사가 어디선가 G에 관한 소문을 들은 듯하다. 언젠가부터 G를 검사님이라 불렀다. G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사를 오고 가는 집이 별로 없는 이 동네는 주민들이 단골로 이용하는 슈퍼나 세탁소 부동산 등을 통해 이웃에 대한 소문이 조용히 났다 사라진다. 


“저녁이니 드립 말고 연하게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G는 커피 원샷을 추출해 뜨거운 물을 부어 아일랜드 바 중앙에 앉은 김 여사 앞에 내려놓았다. 신기하게 사람들은 혼자 오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아일랜드 바에 앉는다. 김 여사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평상시 그녀답지 않게 살짝 들뜬 분위기다.


“검사님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카페에서 G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지 진심으로 동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런 말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어달라는 사전 포석일 뿐이다. 사람들이 아일랜드 바에 앉는 행위는 G에게 이야기를 할 테니 들어 달라는 강한 표현이다. 사람들도 G도 다 알고 있다. 단골들은 대부분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G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G는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주문한 커피를 준비해야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 

“제가 요즘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 허전하고 적적했어요. 마침 친구가 강하게 권하길래 옆에 성당에서 수녀님이 하는 '자기 성장 프로그램’이라는 걸 수강하게 됐어요.”


“성격 유형 탐사도 하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간단한 자기 프로필도 쓰고 미리 유언장과 묘비명도 쓰고 그랬어요.”

“자기 프로필은 쓸 말이 별로 없었어요. 제 삶이 단조롭고 평온했으니까요. 대학 졸업하고 선봐서 능력 있는 남편이랑 결혼. 아들 둘 낳고 부족함 없이 살았거든요. 아이들도 속 썩이지 않고 자기 앞길 잘 찾아갔고.”


김 여사는 G에게 매우 솔직하다. 사적인 은밀한 이야기도 자주 한다. 김여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유언장을 쓰려니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 거예요.”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내일이면 나는 죽는다고 몇 번 곱씹으며 세뇌했어요, 진짜 죽을 사람처럼 느껴보려고. 근데. 푸후흣!”


갑자기 김 여사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웃음보가 터진 사람처럼 정신없이 웃어댔다. 나중에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자 배를 양 팔로 감싸 앉고 웃었다. G는 당황스러웠다. 교양 있는 김 여사가 저렇게 요란하게 웃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죄송해요”


김 여사는 너무 웃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냈다. 그녀는 깊게 숨을 한 번 내 쉬었다.


“놀라셨죠? 왜 사람들이 내일 죽는다 하면 대부분 지난날을 돌아다보면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고 가족들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이런 말 한다잖아요. 천사처럼 착한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김 여사가 또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방 진정이 됐다. 


“그런데 진짜 내일이면 죽는구나 실감하니까 갑자기 아랫배 깊은 곳에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김 여사는 여차하면 또 웃을 태세다. G는 눈을 크게 뜨고 김 여사를 쳐다봤다.


“이 개자식들아! 으하하하!”


김 여사가 또 웃었다. G도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 김 여사는 커피를 마셨다.


“내일 죽는다 생각하니 그동안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제 삶이 얼마나 갑갑했었는지 보였어요. 남들의 시선이 뭐가 그리 중요하고 그따위 품위가 다 뭐라고. 식구들한테 교양 없다는 소리 들을까 참고. 하지 못했던 말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

“유언장 가득 온통 욕이에요. 난생처음 욕이란 욕은 다 해 봤지요. 제가 어떻게 그리 많은 욕을 알고 있었는지 저도 깜짝 놀랐어요. 평생을 고상 떨고 우아한 척 살던 사람이 유언장은 욕으로 도배하다니 너무 웃기죠? 근데 속이 너무 시원해요. 그동안 울적했던 마음도 싹 사라지고”

“나중에 발표용으로 다시 하나 썼어요. 실컷 욕하고 나니까 진짜 식구들에게 고마운 맘이 생겼답니다. 하하”

“이렇게 검사님한테 이야기하고 나니 기분이 더 좋네요. 이 재밌는 일을 혼자만 알고 있기는 입이 간지럽고 어디 말하기는 창피했는데, 검사님 덕에 기쁨이 아주 두 배가 되었습니다. 진짜 감사해요. 이런 얘길 들어주셔서.”


이토록 유쾌한 김 여사를 본 적이 없었다. G는 김여사의 가슴에서 경쾌하게 날아다니는 알록달록한 꽃가루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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