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오늘도 종일 손님이 없다. 이런 날은 드물다. 저녁이 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카페는 적막하다. 그래도 G는 저녁을 먹으러 2층에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즉석 감자 수프를 끓이고 식빵 두 쪽을 꺼내 오븐에 데웠다. 뜨거운 수프에 바삭한 식빵을 찍어 먹었다. 수프를 수저로 휘휘 저어 약간 식혀 그릇째 한 모금 마셨다. 따끈한 수프가 목으로 넘어가니 몸 안에 습기가 빠져나간 듯 개운하다. 연달아 두 번 수프를 들이켰다. 아랫배가 뜨끈해졌다. 남아 있는 수프는 빵에 푹 적혀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카페 문은 일찍 닫으려고 했다.
‘짤랑’
남작가다. 단골 중 한 명. 청년이라 하기엔 나이 들었고 중년이라 하기엔 아직 젊은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40 전후의 남자. 그는 시계처럼 정확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에 4번. 점심때쯤 와서 오늘의 커피 한잔과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총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며 두세 시간 글을 쓰다 간다. 단골이지만 그와 이야기해 본 사람은 없다. 그저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다가 가는 이 남자를 윤은 ‘남작가’라 불렀다. 작가로 짐작되는 글을 쓰는 남자.
그런 그가 다 저녁에 나타나다니. 의외다. 그는 항상 지정석처럼 글을 쓰는 룸으로 가지 않고 천천히 아일랜드 바로 다가왔다.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G는 자리에 앉아 그를 잠시 쳐다봤다. G의 가슴이 남작가의 가슴과 이어졌다. 그의 가슴에서 처음 학교에 가는 잔뜩 겁먹은 아이의 불안과 긴장을 느꼈다. G는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 쉬었다.
“사람들이 여기 앉아 얘기하는 걸 자주 봤어요. 사장님은 말을 못 해 듣기만 한다는 것도 알아요. 오늘은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그는 입술에 힘을 주며 다짐이라고 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커피는 됐습니다. 오늘 너무 마셔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G는 시원한 물을 한 잔 따라 줬다. 남자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갑니다. 웹 소설이라고 아시죠? 저 꽤 유명해요. 돈도 제법 벌어요. 4년 전에 대학 때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와 1년 정도 이 근처에서 동거하다 헤어졌어요. 그녀가 카페 되기 전의 이 집을 참 좋아했어요. 일층은 살림집, 이층은 자기랑 나의 작업실로 쓰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녀와 헤어지고 이 동네를 떠났는데 제 작년에 우연히 왔다가 카페로 변해 놀랐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만 오면 글이 잘 써져요.”
남작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표정이 비장하다.
“대합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재미 삼아 쓴 소설이 제법 권위 있는 공모전에 당선됐어요. 다들 부러워했지만 그게 다였어요. 이후로는 주목을 못 받았어요. 포기하지 않았죠. 졸업하고 논술 학원 강사 하면서 꾸준히 글을 썼어요. 하지만 무명작가 생활이 행복할 리 없죠. 각종 공모전에서 낙방하고 원고를 보낸 출판사마다 마다 거절당하고. 동거하던 여자 친구마저 헤어지고 유학까지 가버려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했어요.”
이 남자는 뭐가 이리 괴로운 걸까. 말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 G는 남작가의 가슴을 느꼈다. 답답하다. G가 자신의 가슴에 집중하며 부드럽게 호흡하자 남작가의 가슴에 조그만 숨구멍이 났다.
“짐을 정리하는데 여자 친구랑 같이 사용하던 낡은 노트북이 나왔어요, 사용한 지 오래된 거라 버릴까 하다 호기심에 그녀가 쓰던 문서 폴더를 열어봤죠. 두서없는 낙서 같은 글이나 잔뜩 있겠지 했는데 놀랍게 그녀가 쓴 소설이 있었어요. 무척 재밌었어요. 참신하고. 알라딘의 램프 미래 버전 판타지 소설인데 램프의 요정 지나가 감정이 있는 로봇으로 나오죠. 조금만 고치면 출판사에서 탐낼만한 물건이 될 것 같았죠.”
“며칠 손을 보고 아는 편집자에게 보여 줬어요. 우선 웹 소설로 연재하면서 사람들 반응을 보고 출판 여부를 결정짓자고 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노트북에 두고 썩히기는 아깝고. 바로 출판하자 그랬으면 그녀에게 연락했을 겁니다. 그런데 연재하면서 반응을 보자 하길래.
“필명으로 연재를 시작했어요. 하필 일회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3회 연재하고 나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출판하자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출판하자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서른이 넘도록 내 이름으로 책 한 권 출판 못한 것도 지긋지긋했고.”
“잠깐 돌았었나 봐요. 노트북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녀가 돌아와서 자기 작품이라고 해도 증명할 자료가 없다. 어차피 연재하면서 내가 대대적으로 손으로 봤기 때문에 온전히 그녀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핑계들로 나를 합리화하면서.”
남작가는 고개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앞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그냥 제 이름으로 출판했어요. 꽤 많이 팔렸죠. 조그만 오피스텔도 구하고.”
“그 후로 시즌 2, 3까지 연재했어요. 물론 그건 전부 제가 썼어요. 덕분에 이젠 잘 나가는 작가가 됐죠.”
“그런데 어제 그녀에게 연락이 왔어요, 한국에 돌아왔다며 만나자고.”
G는 가슴에 얹힌 묵직함에 심장이 조여와 숨쉬기가 힘들었다. 시커먼 바윗덩이가 남작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G와 남작가의 가슴이 이어졌다. G는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가슴에 집중하고 숫자를 세며 천천히 깊게 호흡했다. 서서히 가슴이 환해지며 숨쉬기 편해졌다. 눈을 뜨고 남작가를 쳐다봤다. 두 손으로 머리로 감싸고 있는 그의 숨소리가 편안하다. G는 계속해서 깊게 호흡했다. 남작가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남작가는 그렇게 한동안 머물다 감사를 표하고 카페를 떠났다.
남작가가 오랜만에 왔다. 카페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G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장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왔어요. 저번에 사장님께 제 답답하나 속내를 털어놓고 간 후 진짜 오랜만에 아주 푹 잘 잤어요. 일주일 사이 많은 일이 있었어요. 사장님을 만나고 다음 날 그 친구를 만났어요. 저는 비난 책임 배상 등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받아들일 각오로 나갔어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꼈어요. 하룻밤 사이에 제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마음이 편했어요.
막상 그녀를 보니 무척 반가웠어요. 고해성사를 하듯 제 잘못을 실토하려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너무 뜻밖이었어요. 그녀는 내가 자신이 써두었던 글로 작가로 성공한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요. 노트북에 남긴 글은 자신이 선물로 주고 간 것이라며. 그걸로 유명해지고 돈 벌었으면 자신에게 먼저 연락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섭섭했대요. 그리고 그동안 제가 쓴 글들은 빠짐없이 다 읽었대요. 신간이 어서 나오길 기다리는 팬이라며 저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당분간 한국에 있을 예정이니 종종 만나 데이트라도 하자고 했어요.
제가 자신의 글을 훔쳐서 유명해진 것이 화나지 않으냐고 물었어요.
그녀는 공모에서 떨어지면서 자꾸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초조해지는 제가 마음 아팠답니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창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저를 좋아했대요. 제가 사람들의 인정과 사회적 성공에 자꾸만 집착하는 것이 안쓰러웠답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 글쓰기에는 관심이 없고 글로써 이름을 얻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답니다. 제가 창작에 대한 의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틈틈이 썼던 글이었답니다. 떠나기 전에 이별 편지 대신 주고 간 거래요. 심지어 제가 읽지 않을까 걱정했대요.
집에 돌아와 밤새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남의 글을 훔쳐서 성공했다는 자괴감과 수치심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건 제가 스스로를 벌주는 시간이었지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음을 깨달았어요. 천사 같은 그 친구를 저의 성공을 부수고 망가뜨리려고 하는 괴물로 만들어 악몽을 꿨던 저의 어리석음과 치졸함을 적나라하게 대면하면서 며칠 몸살을 앓았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그녀를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어요. 그녀 덕에 기회를 잡고 성공했음에 고맙다고 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소박한 마음으로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전쟁하듯 글과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글을 쓰는 시간을 여유롭게 즐겨요. 제가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제 가슴이 환하고 따뜻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