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다. 지나와 하나는 가족들의 묵인하에 이상한 독립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눈을 떴다. 밖은 아직 깜깜하다. G는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다섯 시 반. 따뜻한 차라도 마실까 했지만 귀찮다. 이불속에서 조금만 더 빈둥거리다가 일어나려고 했다. 보일러가 돌아가고 방바닥이 따끈해졌다. 몸이 노곤하고 설핏 잠이 들었다.
“드르륵”
핸드폰의 진동음이 요란하다. 밖은 이미 훤하다. 8시. 근래 들어 이렇게 늦게까지 잔 적은 별로 없었다. 이른 시간에 오는 문자나 전화는 좋은 일은 아니다. 선영이다.
“오빠 급하니까 용건만. 지나랑 하나랑 있는 오피스텔이 언론에 털렸어. 아마 기자들이 몰려갈 거야. 근데 지나도 하나도 전화를 안 받아. 기자들 들이닥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애들 빼 와야 해. 나랑 티 형사는 오피스텔에 거의 도착했어. 오빠도 윤이랑 빨리 와.”
선영이 전화를 끊자 윤에게 문자가 왔다.
“선영이 연락받았죠? 10분 있다 카페 앞으로 나와요”
G와 윤이 광화문 오피스텔에 도착하니 9시다. 티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내분이 일어났어요.”
티가 속삭였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은 촘촘하게 블라인드가 내려있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지나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벽에 기대 있다. 선영은 미간을 잔뜩 찌그리고 그런 지나를 강렬하게 쳐다보고 있다. 하나는 현관에 들어서는 윤을 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에서 어색함이 줄줄 흘렀다. 윤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남자가 지나를 알아보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 톱스타였으니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누군가의 부추김으로 유명인의 사생활을 캐는 걸로 유명한 황색 매체에 사진을 팔았다.
하나와 지나에게는 불운이었으나 해당 매체는 운수대통했다. 그들은 더 많은 사진과 이야기가 필요했다. 일주일 동안 취재라는 명목으로 몰래 뒤를 캐고 다녔다.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장의 사진에는 함께 밥 먹고 장보고 산책하는 지나와 하나의 다정하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생활이 촘촘하게 담겨 있었다. 사이좋은 자매 같았고 모자이크 처리된 하나 옆의 지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럽고 예뻤다.
하나는 심심한 대중들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좋은 소재였다. “지나의 미스터리 걸’은 종일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일등이었다. 졸지에‘지나의 미스터리 걸’로 호명된 하나는 지나의 미성년 동성 연인이라는 둥, 지나가 사귀는 돈 많은 이혼남의 딸이라는 둥 황당하고 민망한 소문과 억측의 주인공이 되었다.
최초의 기사가 나오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인터넷 포털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추측성 기사가 넘쳤다. 설상가상으로 최초의 사진 제보자가 개인계정 인스타그램에 하나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사진을 올려버렸다. 하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고 익명성의 보호막에 숨어 학교 이름까지 거론하며 개인정보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윤과 남편에게는 자초지종을 묻는 지인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한 주를 시작하는 무료한 월요일, 평범한 일반인의 이기적이고 부주의한 행동이, 대한민국을 달군 뜨거운 스캔들로 확대 재생산되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언니 그만해. 내가 기자들 불러서 다 밝힐 거라니까. 전부 다 사실 아니고 그냥 연예인 하기 싫어서 도망친 거고, 하나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이젠 은퇴할 거라고. 내가 저지른 일, 내가 책임진다고,”
지나의 목소리는 격양되고 떨렸다.
“김지나 정신 차려. 네가 자금 나서서 ‘사실이 아닙니다’그러면 누가 믿어 줄 거 같아? 다들 사실에는 별로 관심 없어. 단지 이런 선정적인 소문에 휘말린 유명 연예인이 지금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할 뿐이야. 진실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공식적인 소속사 입장을 발표하는 건 그냥 절차야. 이마저 없으면 너무 이상하니까. 재미거리, 흥밋거리. 심심풀이 땅콩, 안주거리로 충분히 소비되고 나야 잠잠해져. 그때까지 기다려야 해. 먹잇감을 찾아 눈이 벌게진 사냥개들한테 너를 던질래? 자신을 보호하는 건 비겁한 게 아니라고 이 바보야!”
“언니 난 너무 억울해. 그동안 엄마랑 언니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시키는 대로 다 했어. 내 의견이나 감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고. 이제 겨우 내 뜻대로 좀 살아보려고 그러는데. 이제 좀 사는 게 재밌어지려고 하는 데 다들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 나 성인이냐. 내가 누구랑 살든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김지나 정신 차려. 너 아직까지는 연예인이야. 사람들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연예인이라고.”
선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 그만둘 거라고! 아 언닌 모르지? 남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혼자 있어도 누군가를 습관적으로 의식해. 그러면서도 누가 옆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저기 있는 어린 하나가 나보다 훨씬 똑똑해. 자기가 뭘 원하는지 어떨 때 기분 좋아지고 행복한지 잘 알거든.”
“너보고 계속 일하라는 말 아니잖아. 일단 하나 일도 처리해야 하고 사태를 좀 수습하고 마무리하자.”
“언니는 매사 이런 식이야. 다 알아서 처리한다면서 나를 무능력자로 만들잖아. 언니를 떠날 수 없게 만들잖아. 나는 이제껏 나만 언니 없이 사는 게 두렵고 무서운 줄 알았어. 근데 오늘 보니까 알겠네. 언니도 무서운 거네. 나한테 언니가 필요 없어질까 봐 두려운 거지? 그래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데 언니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잖아. 아무리 힘들어도 날 위해서라며 뭐든 다 했으니까. 날 위한 거라면서. 고마워. 그런데 어쩌지. 이제 더는 그렇게 살기 싫은데.”
진실은 때론 험악하고 잔인하다.
“하아.. 김지나 아무 말이나 막 하지 말아라.”
“지금의 네 현실을 봐! 저 밖에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몇 마디 하는 것 말고 사태해결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네 뜻대로 한 행동이 도망친 거야. 그 뒤처리는 내가 다 하고 있지. 아직까지도, 아무리 하기 싫었어도 하기로 했던 일은 마무리하고 관뒀어야지. 가출한 하나는 집에 돌려보냈어야 했고. 정말 네 힘으로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면 아무리 억울하고 속상해도 지금은 수모를 참고 견뎌야 해. 잘 생각해 봐. 책임지고 사는 것이 뭔지.”
지나가 울었다. 말 없는 투항이다. 하나가 다가가 흐느끼는 지나를 안았다. 윤은 조용히 선영의 등을 자꾸 쓸어줬다. 티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영과 지나 윤과 하나 그리고 티의 가슴에서 크고 작은 형형색색 불꽃들이 튀어 올라 부딪히고 사라진다. 지는 사랑하는 이들이 아프게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불꽃을 고요히 바라본다. G의 가슴에서 황금빛 물결이 일렁거린다. 잠시 후 모두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 평화로웠다.
선영은 사건 해결의 주도권을 틀어잡았다.
“일단 이렇게 합시다. 가장 급한 건 지나와 하나를 사람들 관심에서 떼 놓는 거야. 일단 윤이 너는 빨리 소속사 공식 입장 하나 만들어줘. 메모! 지나는 지쳐서 휴식 중이었다. 하나는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딸. 방학 중이라 잠시 함께 지내는 중. 시중에 떠돌고 있는 민망한 소문이나 추측성 기사들은 전혀 사실이 무근. 어린 학생이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배려해 줄 것. 악성 댓글이나 일반인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사진의 무단 재게는 강력하게 법적으로 대응할 것임. 지나는 거처를 옮겨 현재 오피스텔에 없음. 오피스텔의 입주민들에게 불편을 주니 취재진은 철수할 것. 이 일로 지나 또한 매우 힘들어하고 있음. 마음을 추스르고 건강한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설 때까지 조용히 지며 봐주길 바람. 얼른 정리해서 내 카톡으로 보내”
윤은 부지런히 메모했다.
“티 형사님은 사무실 법조팀에 상황 설명하고 법적 대응책 요구해 주세요. 미리 말해두었으니까 이리로 전화하세요.”
선영은 티에게 명함을 주었다.
“내가 하나 사진 올린 새끼랑 말도 안 되는 헛소문 퍼트린 것들은 끝까지 찾아내서 책임을 물을 거야. 절대 용서 안 해.”
“오빠는 내가 로비로 내려가서 기자들 앞에서 소속사 입장 발표할 때 눈에 안 띄게 하나 데리고 카페로 가. 윤이 차 써. 윤이는 기자들 철수하고 조용해질 때까지 지나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고. 티 형사님은 밖에서 상황 보고 윤이한테 빠져나갈 타이밍 알려 주고, 그럼 윤이랑 지나는 티 형사님 차로 카페에 가 있어. 형사님은 윤이랑 지나 나가는 거 확인하고 카페 가서 차 키 잦아가세요. 그리고 지나는 며칠 카페 이층에서 지내.”
윤은 소속사의 공식 입장문을 정리해 선영의 카톡 메시지로 보냈다. 선영은 기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로비로 나갔다. 티가 얼마간의 차이를 두고 나갔다. 하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빠한테 카페로 데리러 가라고 했어. 이따 봐”
윤은 하나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언니.”
하나가 지나를 불렀다.
“꼬맹아 고마웠어.”
지나가 하나를 꼭 안았다.
카페까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나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아일랜드 테이블로 쪼르르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G는 시원한 물 한잔을 따라줬다.
곧이어 ‘짤랑’ 카페 문이 열렸다. 하나 아빠다.
“김 하나!”
하나가 흠칫 놀라며 아빠를 쳐다봤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아주 신수가 훤하구나. 얼른 나와 집에 가야지.”
“오랜만에 자장면에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하나 아빠는 방금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무심하게 딸을 대했다. 하나도 아침에 나온 집을 저녁에 들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를 따라 나셨다. 하나는 말없이 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8시가 넘어 윤과 지나가 도착했다.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길이 막히네. 이거 티 형사님 차 키. 내 키 줘요.”
G가 키를 내줬다.
“언니 고마워요, 어서 가 보세요. 남편하고 하나가 기다리겠어요.”
“아까 하나가 내 얼굴 반가워하는 표정이었어요? 지나 씨랑 지냈으니 천만다행이었지.”
“언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창피하지만 제가 16살짜리 하나랑 수준이 딱 맞아요. 하나랑 지낸 며칠이 행복했어요. 친구처럼 같이 지내고 싶은 욕심에 언니하고 남편한테는 너무 죄송해요,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푹 자요. 우리 모두 다 힘든 하루였잖아요.”
윤도 집으로 돌아갔다. G는 지나를 2층 선영 방에 데려다줬다. 티가 와서 자신의 자동차 키를 받아 돌아갔다. 긴 하루 끝에 마침내 안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