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상기된 얼굴로 팔짱을 끼고 거실 소파에 앉아 주방을 노려보고 있다.
주방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부른 건설 업자. 이 집의 리모델링을 맡아 해준 그는 자신이 제주도에 있다며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진아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대신 수리를 해줄 사람이라도 불러 달라는 요구에 요즘은 전기 설비만 봐주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변명 아니 변명만 되풀이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걸 간신 참고 진아는 소송을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협박 같은 강공에 다급했던 지 업자는 전문 수리 업자는 아니지만 자신보다 더 실력이 있다고 근처 마을의 친한 동생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이제 그 동생이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갔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오겠다는 건지. 현관에 들어서는 남자는 인상이 좋았다. 진아는 주방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고칠 수나 있냐고 물어보니 봐야 한다고 했다.
“급하면 주방의 전기 제품은 거실에서 사용하면 돼요.”
그런데 남자의 그 말에 진아는 꼭지가 돌아 버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내가 이 집 고치느라 들인 비용이 얼만 돼?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요! 그만 돌아가세요. 내가 고소할 거예요. 당신들 때문에 내가 남편 눈치까지 봐야 한다고요. 모닝커피 못 마시는 것이 내 책임이에요.? 내가 입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보상해 줄 건가요?”
진아는 아차 싶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책임은 전혀 아니라는 걸 안다. 이쯤에서 심호흡하고 멈춰야 했다. 하지만 분노는 자체 에너지로 폭주하고 머릿속의 제동장치는 고장이 났다.
“모닝커피 따위가 이혼 사유가 되냐고? 당신들의 무사 안일주의가 한 가정을 파탄 낼 수도 있다고? 어쩔 거야? 도대체 어쩔 거냐고? 책임지라고!.”
진아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며 고함을 치다 엉엉 울었다.
“나는 현준이 없이는 못 산다고. 현준이 내 전화를 안 받는다고. 고작 모닝커피 한 잔 때문에 오전 내내 연락이 안 된다고.”
한국한국에서 태어나서 10살 때까지 외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자란 진아.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다. 엄마는 계절에 한 번씩 다녀갔다. 바람처럼 종잡을 수 없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다행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진아를 잘 보살펴 주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랑 지냈던 몇 년이 진아에겐 제일 안정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아는 불행이 늘 자신의 뒤를 따라서 온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고로 한 날 돌아가시고 엄마라는 사람과 살아야 했으니까.
20살이 될 때까지 한 곳에서 1년 이상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유럽. 다음에는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엄마랑 지낸 마지막 나라는 인도였다. 진아의 엄마는 그림 그려서 돈 버는 재주, 남자 꼬시는 재주는 남달랐다. 진아가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건 엄마를 따라 떠돌면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 덕이었다.
진아는 정착하지 못하는 엄마도 불안전한 삶도 증오했다. 낯선 친구, 낯선 선생님, 낯선 엄마의 애인. 진아에게 유일한 안식을 주었던 곳은 도서관이었다. 책들은 처음 봐도 낯설지도 또 무섭지도 않았다. 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얌전히 조용하게 있어 너무 평화로웠다.
진아는 도서관에서 항상 생각했다. 성인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20살 되던 해 엄마 통장을 들고 한국으로 도망 온 진아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떠돌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했으니까. 명문대 외국어과에 진학한 진아는 지신의 불안정한 삶이 가져다준 이득이면 이득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국어 구사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 졸업 후 전문 통·번역사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만난 현준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진아는 현준과 있으면 자신이 삶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행복했다.
하지만 진아는 불안이 컸던 삶의 후유증처럼 인내심이 없고 쉽게 화를 내고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문제를 겪고 있었다. 현준과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관계에서 갈등이 많았다.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향한 갈망이 강했던 진아는 결국 상담을 시작했다. 복잡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한가한 이곳으로 이사까지 감행했다. 진아의 노력과 현준의 협조 덕에 진아의 불안증과 분노 조절 장애는 많이 호전되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 모닝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남편이 며칠째 커피를 마시지 못하자 그 답지 않게 짜증을 냈다. 전에 없는 남편 현준의 짜증과 타박에 안타깝게도 진아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아내가 성이 나면 도망가기 바쁜 현준. 늘 그렇듯 황급히 출근해 버렸고 오전 내내 연락 두절이었다.
진아의 분노 게이지는 점점 상승 중이었고 마침내 엉뚱하게 대신 전기 수리하러 온 선량하게 생긴 동네 아저씨에게 폭발해 버렸다.
그런데 남자는 막무가내로 화를 내고, 아이처럼 울며 떼를 쓰는 진아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은 평화롭고 표정은 온화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인 진아에게 휴지와 물까지 건네고 그녀가 진정되길 조용히 기다렸다.
“남편이 오전에 바쁜가 봐요. 점심시간에는 분명 전화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한 커피 한잔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는 없어요.”
주변은 적막하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성난 용처럼 입에서 불을 뿜어대던 진아가 아기 양처럼 온순해졌다. 정신을 차리자, 진아는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너무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절 구원하셨어요.”
“다행입니다. 주방의 전기는 이제 잘 들어오니, 내일부턴 남편에게 모닝커피 내려주고 두 분 앞으로 계속 행복하세요. “
남자는 마지막까지 덕담을 해주고 떠났다.
현준에게 아침에는 미안했다는 사과의 문자가 왔다. 진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아는 인내하는 삶을 배우겠다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어요. 그동안 잘해온 노고가 가상해 격려 차 도와줬어요.
원래 진아의 집에 오기로 한 사람을 제주도로 휴가 보내고 대신 동네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을 대신 가게 했죠.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진아는 전기 고쳐두러 온 남자와 크게 싸우고 남편과 별거까지 했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신의 관대하십니다. 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니 운명을 탓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