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지 Aug 14. 2021

[개샛길]빨간 열매의 저주

개-샛길 프로젝트 다섯 번째, 진우 이야기

이 글은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개-샛길 프로젝트는 획일적인 목표를 강요하는 사회 압박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샛길로 빠져보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는 2021년 12월까지 주위 사람 100명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글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삶이 무료한 사람에겐 모든 순간이 반짝이는 극적 장면임을, 삶이 풍랑 같다고 느끼는 이에겐 결국 삶이란 조각들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걸 전달해 따스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표현으로 글이 누군갈 찌르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기꺼이 제 주위가 되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빨간 열매의 저주


옛날, 아주 먼 옛날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특별함을 붙잡지 못하는 평범함을 지니고 있었죠.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그는 숲 속 아주 깊은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땔감으로 쓸 나무를 찾아 집 밖으로 나선 어느 하루, 귓가에 스치는 작은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처음엔 바람 소리로 착각할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죠. 집중해서 들으니 'ㅅ'이 들리는 듯했고 이어 '아'와 '과'란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연히 들은 '사과'란 단어는 이상하게 그의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사과'란 것은 그의 인생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를 왠지 모르게 안달 나게 했죠.


그는 결국 한 달에 한 번 그의 집 근처를 지나는 나그네를 기다려 그에게 '사과'에 관해 물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그네가 오겠다 싶은 그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가다가 흙탕물에 신발이 젖어도, 가시넝쿨에 손이 찔려도 그에겐 모든 일이 순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쩌면 귓가에 작은 소리가 스칠 때부터 저주에 걸리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나절 정도 걸었을까 그는 저 멀리 걸어오는 나그네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마침 '사과'를 먹어본 적 있는 자였습니다. 나그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사과를 먹어본 적 있다는 걸 말할 수 있게 돼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 탓에  나그네는 본의 아니게 사과를 사실보다 더 먹음직스럽게 묘사했죠.


"음, 사과는 겉면이 무척이나 빨갛고 그 속은 무척 노랗습니다.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나오는데 좋은 사과는 단물이 물 흐르는 듯합니다. 물론 제가 먹은 사과 역시 그랬고요. 사과를 본다면 그전까지 그렇게 반짝이고 흥미로운 열매를 본 적 없을 테니 보는 순간 그 열매가 사과인 줄 알게 될 겁니다." 나그네의 허영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사내를 한층 더 저주에 가까워지게 만들었습니다.


나그네의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는 길에 그는 집으로 곧장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는 이미 저주에 걸린 상태였을지 몰라요. 저주는 으레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니까요. 그가 그날 장작을 패지 않았다면, 귓가에 스친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면, 우연한 단어가 그를 안달 나게 해도 나그네를 찾아 나설 결심까지는 하지 않았다면 그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모든 가정은 이미 일이 벌어진 상황에선 무용한 것들이겠죠.


그의 본격적인 비극은, 집으로 곧장 향하지 않은 그가 연못 옆 열매를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연못 옆엔 빨간 열매가 피는 나무가 한 그루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그건 주문에 걸린 나무였죠. 그는 그게 사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게 사과였는진 아무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가 나그네를 통해 알게 된 '반짝이고 흥미로운 열매', '보는 순간 그게 사과인 줄 알게 되는 열매'가 실제로 사과이지도 않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사과는 그냥 사과일 뿐이니까요.

연못 옆 빨간 열매를 베어 물은 그는 그날 이후 매일 연못에 찾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연못에 가 열매를 먹는 순간이 아닐 때도 그는 매 순간 빨간 열매를 떠올리게 됐죠. 어떤 날은 열매가 무척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냥 푸석한 야채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죠. 그러나 그는 이미 열매가 진짜 사과인지, 매일 먹으러 갈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못하게 돼버린 상태였습니다. 저주에 걸린 그는 매일 그 열매를 먹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 것이죠.


저주로 인해 그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빨래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장작은 패다가도 그는 자꾸만 빨간 열매가 생각나 그 어느 것도 완성할 수 없게 됐죠. 그는 그렇게 그 유명한 어떤 것도 완성할 수 없는 저주받은 사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빨간 열매의 저주는 세월을 거듭할수록 더 많은 자에게 미쳤습니다. 연못 근처에 작은 마을을 이룰 정도로 많아졌죠. 아, 지금쯤이면 어쩌면 도시를 이룰 정도로 많아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요즘 그 어떤 것도 매듭짓지 못하는 상태라면, 당신도 빨간 열매의 저주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작가의 이전글 [개샛길]사랑의 파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