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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지 Aug 14. 2021

[개샛길] 일로 만난 사이

개-샛길 프로젝트 일곱 번째, 선영 이야기

이 글은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개-샛길 프로젝트는 획일적인 목표를 강요하는 사회 압박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샛길로 빠져보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현지의 개-샛길 프로젝트는 2021년 12월까지 주위 사람 100명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글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삶이 무료한 사람에겐 모든 순간이 반짝이는 극적 장면임을, 삶이 풍랑 같다고 느끼는 이에겐 결국 삶이란 조각들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걸 전달해 따스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표현으로 글이 누군갈 찌르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기꺼이 제 주위가 되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일로 만난 사이


"시원섭섭하니, 그저 시원하기만 하니?" 마지막 근무를 며칠 앞둔 점심에 그가 나에게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순간 섭섭함이 밀려와 그에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실감이 안 나서. 저 이래 놓고 다음 주 화요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저 출근했어요' 하면서 매장에 들어올지도 몰라요"하고 대답했다. 육 개월 동안 했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준비는 돼 있었지만, 그와 헤어질 준비는 미처 하지 못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싶었다.


오며 가며 지나치듯 봤던 주황색 간판의 즉석 떡볶이집 <고양이 부엌>. 장사 초반에 고양이 사료 파는 곳인 줄 알고 잘못 방문한 손님이 있었다는 걸, 이 가게의 꿀조합은 '짜장 소스에 고춧가루 한 숟갈, 그리고 햄 사리'라는 걸, 눈이 많이 오는 날이 이 가게의 대목이라는 걸 내가 알게 될 거라 생각지 못했었다. 이젠 이 가게의 많은 비밀을 알게 됐고 단골의 얼굴들이 눈에 익을 참이었는데 어느새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친분을 목적하지 않은 사이라는 건 오히려 서로를 더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줄 구실 일지 모른다. 서로를 얼른 알아야 한다는 조급함 없이 자연스레 자신을 노출하기 때문일까. 난 사회에서 흔히 하는 몇 살이니 어디 학교를 나왔니 하는 호구조사보다도 그를 훨씬 잘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와 함께 일하며 자연스레 사소한 습관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령 머릿속에 무언갈 정리해야 할 때 말끝마다 OK를 붙인다던가 그는 한국 정통 발라드의 찐 팬이라던가 하는 작은 것들을(육 개월 동안 평생 들을 발라드 다 들은 것 같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내가 그를 '안다'고 느낀 지점은 바로 이런 것들에서부터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를 샅샅이 아는 건 아니다. 인스타로 소식을 공유하는 친구들보다도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다. 쉬는 날 어디를 여행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앞으로의 인생 계획은 어떻고 요즘 보는 책이 뭔지, 그런 걸 시시콜콜 공유하진 않으니. 내가 아는 건 그가 나에게 말해준 만큼의 그다. 그 역시 그렇다.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건 내가 말해준 만큼의 나일테다. 


그럼에도 난 그에 대해 '알지' 않아도 그에 대해 알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를 만났던 것 같다. 육 개월 동안 그는 누구보다도 나에게 가장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나 역시 스물네 살의 가을과 겨울을 그에게 온전히 보여준 듯하다. 주절주절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그에게 흘려보냈던 나의 고민, 신앙 얘기, 바람들에서 그도 나를 알아갔을 테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친구들과 함께했던 글 모임에서 '나이 듦'에 대한 글을 썼던 적 있다. 난 '산다는 건 들여 쓰기 없는 긴 글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당사자는 콤마의 이유를, 쉼표의 쓰임을, 문맥의 모든 흐름을 꿰고 있으나 다른 이에겐 끊김 없이 써 내려진 뭉텅이에 불과하다. 시간이 흐르며, 나이가 들어가며 잊어버릴 순간들에 이름을 붙이고 색칠하며 이정표들을 세우고 내 순간들을 기억해줄 사랑하는 이들이 없다면 내 삶은 덜 활기찬 삶일 것이다'고 글을 끝맺음했었다. 나의 커다란 쉼표를 주황색 간판의 그 작은 떡볶이집에 두고 가는 기분이다.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고 언제나 익숙해지질 않는다. 헤어짐은 우리가 만났었단 사실을 더욱 부각한다. 참으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건, 그가 정말 위계 없이 나를 대하고 마음이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내 스물네 살의 가을과 겨울을 따뜻하게 채워주어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P.S 고양이 부엌 언남점을 가시는 분들, 꼭 짜장 소스에 고춧가루 한 숟갈 더하고 햄 사리 추가해서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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