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골프 같은 운동. 운동도 몸치인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다른 운동보다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라면 더더욱 나와는 멀게만 느껴졌다. 하고 싶던 일을 하며 먹고살 수가 없어서 비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미 해봤던 일이라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한 가지 추가된 업무는 '골프장 라운딩 예약'이 있었다. 그렇게 어느샌가 골프가 내 인생에 끼어들었다.
골프장마다 예약 방법의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골프장 홈페이지에 접속해 로그인을 하고 원하는 코스와 시간을 클릭하는 방법. 정해진 시간에 골프장 서식에 맞춘 예약 신청서에 회원 성명을 적고 원하는 시간대와 코스를 명시하여 예약실로 팩스를 보내는 방법이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다. 임원이 원하는 날짜의 원하는 시간을 다른 회원들도 원하는 황금시간대였다. 예약이 시작되는 시간의 정각에 누구보다 먼저, 빠르게 일을 끝내야 했다.
비서일을 처음 시작한 건 25살의 가을이었다. 일을 시작한 뒤로 1년 가까이는 퇴근하고 출근할 때까지 고민하고 또 의심했다. 실수가 잦았다. 그리고 그 실수를 알아 차린 후, 상사에게 보고를 하며 혼이 날 생각에 혼자서 전전긍긍하면서 일을 키웠다. 지방에서 일정으로 임원들이 모두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할 때였다. 상사의 상사의 비서가 일괄적으로 KTX 예매를 하고 알려주면 나는 출발지와 도착지 출발일과 시각만 임원에게 잘 전달하면 되었다. 열차 예약에 관한 업무 메일을 받고 임원에게 전달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미팅과 미팅 사이 또는 집무실에서 업무에 집중하다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틈에 나는 보고 드려야 할 내용을 빠짐없이 전달하곤 했다. 첫 번째 메일을 받았을 땐 잘 전달했다. 오늘의 할 일을 끝냈다고 생각했을 때 두 번째 메일을 받았다. 열차의 시각이 앞당겨져 있었다. 퇴근 전에 전달해야 했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쳤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할 일을 끝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출근을 서두르고 출근하면 매일 같이 하는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제 끝내지 못한 일을 깜빡했다. 다시 기억이 돌아왔을 땐 상사가 무서워 실수를 바로 잡지 못하고, 애매하게 열차시간 보다 여유 있게 기차역에 도착하는 게 좋겠다는 말만 전했다. 그렇게 나의 상사는 열차를 놓쳤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예상시간보다 빠르게 기차역에 도착한다면 열차를 탈 수 있을지도 않을까? 행운이 따라주길 바랬다. 하지만 열차는 버스 정류장에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타는 교통수단이 아니지 않은가? 열차의 차량번호, 출발시각에 꼭 맞는 열차를 타니까. 이런 실수를 하는 나는 비서에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다 1년의 시간이 지났고 알았다. 이런 실수를 하는 나는 다른 일을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그 뒤 1년은 내가 비서 업무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기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 2년의 시간은 나를 성장시켰다. 과거의 나를 몰랐던 새로운 장소, 새로운 상사와 손발을 맞추며 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평가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고 더 잘하고 싶었다. 골프 예약이 있는 날이면 예약시간 5분 전 알람을 맞췄다. 5분 동안은 모니터 앞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다행히 팩스로 예약 신청과 시간이 겹치지 않았다. 내 마음과 다르게 결과가 좋지 않은 날도 있었다. 예약을 실패하는 날은 없었지만 원하는 예약 시간을 선점하지 못하는 날은 종종 있었다. 그 결과를 전할 때면 임원의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나보다 경력이 오래된 비서에게 팁을 얻기도 했다. 예약 전 컴퓨터에서 사용하고 있던 모든 프로그램을 종료한다. 그리고 모니터에 작은 점을 찍었다. 원하는 시간대가 보이는 곳. 예약이 오픈되는 동시에 기계적으로 그 점을 클릭한다. 그 뒤로 나는 성공률이 9할 이상이 되었다. 내 상사의 상사 부킹까지 추가 업무로 받았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의 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옆의 비서의 부킹도 도와주던 어느 날, 그 비서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뛰어왔다. 예약을 하는 날이었는데 나에게 그 일정을 공유하지도 않았고 자신도 있고 있다가 예약시간이 20분 이상 지난 상태에서 기억이 떠올랐다고 했다. 오픈과 함께 60초 전에 끝났을 예약을 이제와 어쩐단 말인가. 나는 그 비서에게 어서 실수를 보고 드리고 대책을 세워보자고 했다. 그런 나에게 비서는 물었다.
"인터넷이 잠깐 안되었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가끔 사람이 절박해지면 또는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잠시 판단력을 잃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과거의 나처럼. 다른 직원들 다 인터넷 잘 사용했는데 우리만 인터넷 접속이 안되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될 턱이 있나. 그냥 사실대로 최대한 빨리 보고하라고 그게 가장 최선이라고 말했다.
29살의 나에겐 골프란 다른 사람을 위해 예약을 하던 운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예약을 위해 알아야 했던 골프 용어]
1. Tee-off : 사전적인 의미는, 티에서 공을 (특히 제1타를) 치다. 골프 라운딩을 시작하게 되는 시간으로 생각하면 쉽다. TEE TIME 최소 30-45분 전에 골프장에 미리 도착해서 몸을 풀고 경기할 준비를 하는 편이다.
“나인홀 붙일 수 있는지 한번 알아봐요”
“네? 네…”
나인홀을 붙인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