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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Jun 20. 2020

대체 불가능한 맛

첫째를 임신하고 극심한 입덧에 시달리며 내 인생에 둘째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지. 나는 입덧의 고난과 출산의 고통을 잊고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보고 임신을 확인했을 땐 이미 온라인 글쓰기 강좌를 신청한 후였다. 이틀에 한번 한 편의 수필을 쓰고 첨삭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글을 쓰기는커녕 일상이 멈춰버렸다. 매주 두 번씩 가던 필라테스를 쉬어야 했고 독서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일러스트 수업은 나의 위장에 평화가 찾아오면 남은 수업을 듣기로 했다. 잠에서 깬 순간부터 다시 잠들어 눈감는 순간까지 속이 메스꺼웠다. 매 순간 먹은 것이 되넘어 올 것 같아 검은 비닐봉지 없이는 외출할 수 없었다. 작가에게 전에 써두었던 글을 하나씩 보냈다. 그런 나에게 작가는 시의성이 있는 현재의 글을 읽고 싶다는 피드백을 주며 입덧에 대한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내가 겪어본 입덧은 새 글을 쓸 수 있을만한 곁을 주지 않았다. 매 순간 무엇을 먹으면 속이 편안할 수 있을지 그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입덧이 너무 심한 날을 꼭 이러다 죽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고 입덧하다가 죽은 사람은 없는지 검색해보기도 했다. 검색 결과 입덧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입덧으로 고통받다 죽게 된 시초의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 속을 편안하게 해 줄 음식을 찾는 일에 더 매진하기로 했다.


위급한 상황에선 익숙함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엔 친정엄마표 김치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엄마가 담근 김치로 만든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고 매콤한 김칫국이 생각나고 바삭한 김치부침개가 당겼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도시락을 싸주는 엄마에게 나는 매일 김치를 챙겨달라고 했었다. 매끼를 먹을 때 김치를 먹어야 밥을 제대로 먹은 것 같았고 김치 중에서도 꼭 우리 엄마의 김치를 먹어야만 만족스러웠다. 친구가 도시락에 챙겨 온 김치로는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첫째 때는 친정이 멀지 않아서 엄마의 밥과 김치를 자주 먹을 수 있었지만 둘째 때는 경기도에 살고 있는 엄마와 마산에 살고 있는 나의 물리적인 거리만큼 엄마의 집밥을 먹기 힘들어졌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의 김치볶음 레시피를 전달받았다. 엄마에게 받은 잘 익은 김치를 들기름에 달달 볶고 고향의 맛 수프와 설탕을 살짝 넣어주면 된다고 했다.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잘 볶아주면 끝. 간단하게 만들 수 있지만 너무 그리웠던 그 맛이었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면 미역국에 밥을 말아 한 술 뜨고 그 위에 할머니가 담근 배추김치 한 조각을 얹으면 금세 밥 한 공기를 비웠다. 어릴 땐 양념이 거의 없던 배추 줄기의 아삭한 식감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양념을 가득 품고 있는 이파리 부분을 좋아한다. 삼시 세 끼를 볶음김치만 먹으면서 생각했다. 엄마의 김치 담그는 레시피를 전수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이번에는 입덧의 기억을 망각하지 않고 셋째는 절대 낳지 않을 생각이지만, 나중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 김치를 먹을 수 없게 되겠지. 내가 힘들 때마다 찾던 음식을 나는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당장 내가 김치를 담그지 않더라도 엄마가 건강하셔서 배울 수 있을 때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리엔 관심도 소질도 없는 내가 배운다고 배울 수 있는 맛일까? 요리 난이도 하의 미역국 조차 나는 아직 잘 끓이지 못하는데……. 아직은 게으른 마음이 커서 엄마가 힘들게 담근 김치를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뿐이다.


어떤 미래는 예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언젠가 엄마가 담근 김치가 든 통을 냉장고 한 구석에 유물처럼 보관하고 있을 미래의 내가 보인다. 그 미래가 최대한 늦게 찾아오기를 바라며 엄마의 배추김치 맛을 흉내 낼 수 있도록 게으름을 이겨보아야겠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만큼 외식과 배달음식을 먹는 횟수를 줄이고 찬은 많지 않더라도 정성이 들어간 건강한 밥상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차려주고 싶다. 아이들에게 힘들고 지치는 일이 있을 때 따뜻한 밥상을 차려줘야지. 아, 그전에 엄마 손맛을 따라한 김치를 담가 먼저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할머니에서 엄마에게 전해진 사랑과 부지런함을 먹고 자라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어요.


추신 - 할머니에서 외삼촌으로 전해진 배추물김치의 레시피도 내가 전수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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