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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Feb 25. 2023

끝을 바라보는 마음

 지난주, 만삭인 아내의 모습을 기록하자며 사진을 찍기로 했다. 물론 돈 한 푼에 옹졸한 나는 좋은 스마트폰 있고 삼각대도 있는데 무슨 스튜디오냐며, 벽 한쪽 치우고 예쁘게 찍어주겠다며 부산스럽게 준비를 했다.


 결혼 전에도 스튜디오 사진의 가격을 듣고 생긴 막막함이 잠시 떠올랐다. 양재 꽃시장에 달려가 칼라, 라넌큘러스, 프리지아 한 다발씩을 합쳐 3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사고, 수소문 끝에 용마랜드라는 곳을 사진 찍는 장소로 정했다. 폐업한 놀이공원을 야외 사진 촬영 배경으로 쓰게끔 운영하는 곳이었다. 을씨년스러운 장소를 배경으로 몇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셀프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다 그렇듯, 몇 장 건지지는 못했었다. 사람들은 예쁘다 해줬지만, 아마도 남들처럼 멋들어지지 않은 사진이 웨딩 사진이라고 하는 것에 석연찮은 기분을 느꼈으리라.


 이번에도 양재로 꽃을 사러 가는 길에, 스멀스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기억을 억누르며 라넌큘러스와 튤립, 이베리스, 설유화를 한 다발씩 샀다. 물가는 4년 전과 다르게 한 다발에 만원이 넘는 것들이 많아서, 이게 잘하는 건가 싶긴 했지만 그래도 왔으니 사야지. 아내는 노란색을 좋아해서 튤립은 노란색으로, 이베리스와 설유화는 내가 좋아서 그냥 집에 놓고 싶어서 샀다. 라넌큘러스는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꽃인데, 만개한 것은 2만 원 가까이한다고 하여 봉오리 진 1만 원대의 다발을 사 왔다.


 걱정했던 것보다 사진 촬영은 수월했다. 서로 사진 찍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만삭의 임부와 함께하는 작업은 짧은 호흡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기에, 쉬는 시간 동안 서로 지치거나 기분 나빠지지 않게 잘 다독이면서 촬영을 하니, 웃으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결과물도 걱정보다 괜찮아서, 이 정도면 앞으로는 더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봉오리 정도였던 라넌큘러스는 생각보다 사진이 잘 안 받아서, 그다음 주말에도 잘 살아있으면 그때 다시 찍어보기로 했다.


 며칠 뒤 퇴근하고 집에서 마주한 꽃병 속의 라넌큘러스는, 상상하던 아름다움 이상의 모습이었다. 이 꽃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예쁜 순간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며 아내와 이야기를 했다. 이 순간 찍었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부터 만개한 것을 사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며.




 드루이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나는 식물을 잘 키우는 편이다. 방법은 모른다.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식물을 보면 물을 달라고 하는 게 들리고, 빛을 보고 싶다고 하는 게 보인다. 요새 힘이 없어 보이는 녀석에겐 영양제를 좀 주면, 다시 힘을 내곤 한다. 연애하던 시절 아내에게 선물했던 많은 화분들이 썩거나 말라죽어가는 걸 보면서, 우리가 함께 살면 과연 식물들이 죽을까 살까 우스갯소리로 걱정하던 것에 비해, 신혼 때 장만한 화분들은 4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


 하지만 유난히 꽃을 사는 것은 싫어했다. 꽃은 오래 키우지 못하니까. 판매를 위해 꺾은 시점에 이미 꽃의 생명은 끝을 바라보게 된다. 그 죽어간다는 느낌이, 꽂아놨던 화병의 물이 탁해지고 썩어가는 그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 싫어서, 꽃을 집에 놓는 것은 피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꽃을 자주 사주지 못하고, 초록색이 좋다는 이상한 핑계로 다른 식물 살피는데만 집중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어물쩍 넘어갔던 우리의 프러포즈 순간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큰 꽃다발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말에, 나는 적잖이 무너졌던 것 같다. 잘하는 남자친구, 노력하는 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의 삶에 아쉬움을 남겼다는 사실을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한 동안 화풀이처럼, 정말 화가 나서 산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러지 않았던 나를 벌하기라도 하듯이 매주마다 퇴근길에 꽃을 샀다. 처음엔 좋아했지만,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아내는 더 이상 꽃을 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꽃을 사는 마음의 내용을 어렴풋이 느꼈겠지. 그렇게 한 동안 이어진 나의 꽃 반항기가 끝났다.


 요즘은 간간히 꽃을 산다. 술이 오른 상태로 꽃집을 지나갈 때, 아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거베라나 노란 폼폰 국화가 보일 때, 만원이든 2만 원이든 내고 산다. 어떻게든 오래 살려보고 싶어서, 사선으로 꽃대도 잘라보고, 보존제도 넣어보고, 물도 갈아주곤 한다. 그러다 보면 2주 정도는 예쁘게 지내주는 것 같아서 좋다. 그리고 어제의 라넌큘러스처럼, 그 꽃이 보여주는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면, 보내줄 준비를 한다. 몇 번의 반복 끝에, 이제는 꽃을 처음 볼 때부터 끝을 생각한다. 너의 끝까지 내가 잘 지켜보고 보내줄게.




 어린아이처럼 절정의 순간을 즐거워하다 어느 순간 다가온 끝을 마주했을 때 처음 느끼는 상실감은, 끝이 두려워 절정의 순간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스름과 함께 맞이한 혼자라는 느낌은,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경계로 바뀌고, 나중에는 한창 재미있는 순간에도 혼자가 될 걱정에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어른이라고 다를 건 없다. 마음을 열고 통했다는 즐거움 뒤에 올 배신이 두려워 마음을 닫고, 눈부신 젊음이 늙고 살진 노인의 모습이 되었을 때 식을 마음이 두려워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며 돈을 추앙한다. 다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스스로를 잘하는 것이라 다독이며 결국 혼자가 되고, 서서히 메말라 간다.


 만나보지 못한 절정의 순간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꽃을 만나기 전에, 나는 꽃이 지는 것이 싫어서 꽃의 아름다움을 비하했다. 그 아름다움을 마주하지 않았기에 비하가 가능했겠지. 그 아름다움을, 사람 마음의 온기를, 함께하는 따스함과 행복을, 마주하면 거부할 수 없는 그 느낌을 받으면, 끝이라는 상실감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상실로 인해 그 순간이 절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끝이 없었다면 결코 몰랐을 그 찰나의 행복은, 끝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너를 만나기 전엔 몰랐던 마음을 이제는 안다. 용기를 내어 상실감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 나에게, 너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이다. 오늘도 오지 않은 늙어감을 걱정하고, 때로는 만개하지 못했다며 지난날을 후회하는 너와 함께 하면서, 너와의 끝은 어떨지 생각한다. 늙어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그때 진짜 좋았었다고 말하는 너를 상상한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헛헛하게 웃으면서, 자녀에게, 혹은 손주에게, 행복을 겁내지 말라고 얘기하는 너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때쯤에는 너도,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었는지 알게 되겠지. 그때까지, 끝까지 내가 잘 지켜보고 보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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