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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ug 22. 2023

달리다 마는 삶

이제는 도망가지 않겠다.

 첫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 그러니까 만 34세가 되어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였다. 심장 검사 결과지에는 '불완전 우각 차단'이라는 처음 보는 단어와 함께, 낮은 수준의 역류가 관찰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금 알아보니, '우'각 차단은 그 자체로는 임상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역류의 수준도 낮아서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고등학교 생명과학 이야기를 해 보자. 알아둘 필요는 없다.


 심장에는 심장 박동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근섬유가 있다. 학생 때는 동방히푸라고 외웠는데, 동결절 → 방실결절 → 히스속 → 푸르키네 섬유로 이어지는 심장 박동 신호 전달 체계가 있고, 히스속 단계에서 이 섬유는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좌심과 우심으로 향한다. 이를 각각 좌각, 우각이라고 하는데, 이때 우각으로 박동 신호가 이동하는 것이 차단되는 것을 우각 차단이라고 한다. 우각으로 박동 신호가 안 가도, 좌각으로 간 신호가 곧 우각 쪽도 박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단순한 우각 차단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서울 아산병원 홈페이지의 설명이다.

 


서울아산병원 건강정보 발췌 (전도 장애 | 질환백과 | 의료정보 | 건강정보 | 서울아산병원 (amc.seoul.kr))


 죽을병인가 싶었던 증상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한 편으로는 비겁한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마음에 합리화가 시작됐다.






 나는 달리기를 잘 못한다. 단거리도 못하고, 장거리도 못한다. 체력장을 하면, 보통 반에서 꼴등 혹은 꼴찌에서 2등 정도였다. 다른 모든 것들은 1급 점수가 나는데, 유독 달리기만 못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남자 어린이들한테 운동은 자존심이다. 나는 축구도, 농구도, 어느 정도 곧 잘하는, 꽤 운동 신경이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달리기만 유독 못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한 학년을 지내면 반드시 부끄러운 날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신체검사, 다른 하나는 체력장이었다. 신체검사를 하면 유독 보기보다 무거운 체중을 가졌던 게 그렇게 부끄러웠고, 체력장은 앞서 이야기한 달리기. 어린 나이에 다이어트를 할 생각은 차마 안 해봤지만, 가을 체력장은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대비하곤 했다.


 집 근처에는 400m짜리 트랙이 있는 체육공원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중학생의 체력 검정 달리기는 1.6km였으니, 네 바퀴를 돌면 된다. 목표는 딱 하나였다. 1.6km 안 쉬고 뛰기. 중학교 1학년 때 안 쉬고 뛰는 것조차 하지 못해 10분대의 기록으로 꼴찌를 했던 게 너무 부끄러웠고, 2학년 때는 미리 연습을 한 덕인지, 8분 30초 정도에 들어왔었던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뒤에서 2등이었다. 3학년때는 8분 10초대였고, 그렇게 내 체력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등학교 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체력장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군 생활에서는 특급 전사라는 개념이 생겼고, 특급 전사는 휴가를 준다고 했다. 병장이라 휴가가 아쉬웠던 나는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팔 굽혀 펴기도 100개씩 하던 훌륭한 몸 상태였고, 사격은 눈이 좋아서인지 항상 다 맞추는 특등 사수였지만, 자격 신설 당시 기준이었던 1.5km 5분 40초의 벽은 너무 높았다. 두 번의 도전에서 달리기를 실패했고, 세 번째 도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였던 것 같은데, 매번 도전하는 노력이 가상했는지 그냥 합격이라고 말해준 것 같다. 그렇게 젊은 날의 최고점이 찍혔다.

 





 달리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애플워치나 여타 어플로 측정한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라는데, 보통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1km당 5분대의 기록으로 5km씩 뛰곤 한다.


 다이어트를 하는 요즘, 나는 아침마다 1km를 뛴다. 속도는 정말 처참하다. 하지만 이곳은 더 솔직한 나의 공간이니, 기록을 공개해 본다.

 1km를 6분 30초를 걸려서 뛴다. 1.6km를 뛰면 9분 40초가 걸린다는 얘기다. 나는 지금 중학교 1학년, 꼴찌 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와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인 오늘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1.5km를 뛰어봤다. 평소보다 500미터 더 뛴 것이다. 페이스는 더 느려졌고, 시간은 10분 30초. 중학교 때 꼴찌하던 수준보다 더 느려졌다.


 사실 더 뛸 수 있었다. 분명히 심장이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평소보다 50%나 더 뛰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래, 열심히 했고, 오늘 갑자기 더 뛰면 내일은 안 뛰게 될 거야, 하는 마음이 들면서 다리가 멈췄다. 커피를 사러 걸어가는 길에, 거친 호흡이 점점 잦아들면서, 견디기 힘든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오늘도 나는 이 정도에서 멈췄구나.






 처음으로 돌아가, ‘불완전 우각 차단’이라는 증상을 알게 되고, 무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된 후에 든 생각은, 아주 비열했다.


 ‘아, 내가 이래서 달리기를 하면 숨이 빨리 찼구나, 그래서 내가 달리기를 못 한 거였어. 내 의지가 약한 게 아니고,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어.’라는 핑곗거리가 생기자, 나는 당당해졌다. 심지어 이 핑곗거리는 위험한 증상도 아니라고 한다.


 얼마나 달콤한 핑계인가. 나는 이제 더 노력하지 않고도, 남들에게 내가 왜 달리기를 잘 못 하는지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단거리는 내 하체 골격, 무릎 관절 각도가 훌륭하지 못해서 그렇고, 장거리는 이 심장의 불완전 우각 차단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면 된다. 그럼 그게 뭔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아 뭐 그렇구나’ 또는 ‘혓바닥이 기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거다. 적어도 의지가 약하고 운동부족이라는 생각은 안 하겠지.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이런 식의 타협과 합리화로, 내 인생은 항상 달리다 멈춘 사람 같았다. 안 뛰는 것보다 낫다는 주변의 위로와 격려, 몸이 원래 이렇다는 핑곗거리, 이 정도면 열심히 한 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승심은, 달리기 만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나는 항상 그랬다. 아무리 수영 강사가 슬리퍼로 때렸다고 해도, 정말 수영을 더 하고 싶었다면 센터를 옮겨서라도 했을 거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생 때도, 나는 달리다 멈췄다. 아마 조금도 놀지 않고, 하루 종일 공부만 했는데도 최고의 대학을 가지 못한다면,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까 봐, 고3 수험생 시절에도 매일 축구를 하고, 공부에 전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나는 이 정도 대학은 갈 수 있는데, 더 열심히 했다면 더 잘 갔을 거라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고시촌에 있을 때도 비슷했을까, 생각하기 싫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 삶을 살았을지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항상 달리다 멈췄다. 쓰러질 때까지 달려도 완주하지 못하는 나를 보는 게 무서웠다. 최선을 다했는데 최고가 아닌 나를 보는 게 싫었다. 이게 전심전력이 아니라는 여지를 남기기 바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노력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계를 마주하는 경험을 쌓지 못하고, 승리의 경험을 쌓지 못했다. 완주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아주 단순한 회사 일 조차도 환호받으며 시작해 조잡하게 마무리하는, 용두사미가 버릇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또 달리다가 멈췄다. 수많은 내적 핑계와 함께.


 이제는 그만 도망가고 싶다.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부끄러운 사람은 그만하고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을 달리기로 해 보려 한다. 남들 다 뛰는 거 뭐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냐 할 수 도 있겠지만, 평생 도망만 다녔던 내게는 큰 도전이다. 이것저것 재고, 도망갈 핑계를 찾는 것보다, 일단 뛰어보자. 내가 달리기 하나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인생도 똑같을 거다. 도망가는 삶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아내와 자식에게, 사지 건강한 몸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게, 달리기로 시작해 보려 한다. 내가 10km를 1시간 안에 뛸 수 있다면, 도망쳤던 공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현실 앞에 외면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들 결과의 불확실성을 안고서도 최선을 다하는데, 쪽팔리게 앞뒤 가능성 재고 간 보고 도망가지 않겠다. 최선을 다 하고,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볼 것이다.






 군대에서 특급 전사가 되기 위해 매일 뛰던 시절, 후임 중에 1.5km를 4분대에 끊는 녀석이 있었다. 김해에서 목공소에서 일하다 왔다는 녀석이었는데, 한 번은 내가 달리기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늘 갑자기 그 친구와 했던 대화가 생각나서, 그 대화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너는 달릴 때 안 힘드냐?”


“힘듭니다. 죽을 것 같은데 그냥 참고 뛰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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