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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Jan 02. 2020

봉사활동으로 나란히 나란히

NGO 봉사단 활동이라 쓰고 배움과 연대라 읽다

2020 월드프렌즈 NGO 봉사단 단원 모집. Photo: KCOC


다시 월드프렌즈 코리아(WFK) NGO 봉사단 모집의 시기가 돌아왔다. 시기가 돌고도는 동안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NGO 봉사단 모집 공고를 뒤적이던 나는, 르완다에선 단원분의 매니저로 함께 일했고, 지금 서울에선 나가 있는 단원분들과 소통하며 일하는 입장이 되어있었다. 개인적으로 NGO 봉사단을 포함한 월드프렌즈 봉사단 제도 전반에 아쉬운 점들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그런 제약을 넘어 단원분들이 그 시기를 의미 있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월드프렌즈봉사단에 대한 나의 아쉬움은 지난 글에서 정리했었다. https://brunch.co.kr/@theafricanist/36)


결국 이 고민은 봉사, 그리고 NGO 봉사단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몇몇 봉사활동과 NGO 봉사단을 거쳤기 때문에, 나에게 '봉사'는 무엇이었나, 그리고 많은 경우 자신이 활동가인지 봉사자인지 파견 직원인지 정체성 고민에 빠지게 되는 NGO 봉사단의 의미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대학생 때 했던 '농활'이 먼저 떠올랐다.


나에게 대학교를 다니며 가장 열심히 한 일, 혹은 가장 잘한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농활을 꼽을 것이다. 지금은 몇 번을 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학교생활을 거의 않던 4학년 때를 제외하면 학과 농활에 거의 매번 참석했고, 학과 학생회를 하던 2학년 때는 농활을 주로 담당하던 연대사업부장을 맡기도 했다.



농활, 농촌봉사활동 혹은 농민학생연대활동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중후반 때도 그랬고, 농활이라는 단어와 활동 자체가 가물가물해져 가는 지금도 농활이 '농촌봉사활동'의 줄임말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갔던 농활은 '농민학생연대활동'이었다. '농촌봉사활동'과 '농민학생연대활동'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교류와 학습, 그리고 당연하게도 연대이다. 다시 말하자면, 농촌봉사활동은 대학생들이 어려운 농촌에 가서 농가의 일손을 돕는 활동이라고 풀어쓸 수 있을 것이고, 농민학생연대활동은 대학생들이 농민들과 교류하며 농촌의 삶에 동참하고, 우리나라 농업의 현실에 대해 배우며, 어느 곳에서든 농민과 연대하는 활동이라고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갔던 초기의 농활(2007-2008년)에는 '교양'시간이 있어 당시 이슈였던 한미 FTA나 쌀시장 개방 등에 대해 학습하고 토론하는 시간과, 각자가 하루 동안 농민분들과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떻게 교류했는지 매일 저녁 나누는 '총화'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농민회에서 주최한 FTA 반대 집회 등에 참여하는 것이 농활 일정에 포함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엔 농사일에 초점을 맞추어 그저 묵묵히 일만 열심히 하던 농활대원(학생)도 점차 농민, 그리고 농민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혹은 농촌 봉사하러 왔더니 운동권 사상을 주입하려 한다며 불편해했다.)


2008년 여름농활. 집회 시작 전 학생들이 연대발언을 하는 모습. Photo: 우승훈


하지만, 교양과 총화가 없었더라면, 그러니까 일손 돕기에 초점이 맞춰진 '농촌봉사활동'이었다면 이런 교류와 연대에 대한 고민이생기지 않았을까? 적어도 일손 돕기 없이 그저 앉아서 교양과 총화만 계속했다면 연대가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은 해볼 수 있다.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대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연대를 위해선 연대할 상대방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봉사는 보통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여 애쓰는 일을 뜻하는데, 이때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자신의 관점도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위해 애쓰는 일을 하려 한다면 그 과정은 공감과 이해의 훌륭한 초석이 될 것이다. 즉 연대와 봉사는 아주 가까이 붙어있는 개념이다.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농활에서 맺은 농민들과의 인연은 점점 희미해졌지만, 그때 함께 땀 흘리며 일하고, 보고, 배우고, 이야기한 기억들은 여전히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 지금도 농민, 농업과 관련된 이슈가 생기면 남일 같지가 않다.



그런 '봉사자'이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봉사자'

연대와 봉사가 매우 가깝다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봉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는 '좋은 일', '남 돕는 일', 봉사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 혹은 '신실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봉사자'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혹은 그런 프레임에 갇히고 싶은 그런 '봉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 수발부터 한부모 가정 자녀들의 문화체험 프로그램 진행, 케냐 학교에서의 단기 교육 활동, 서울 달동네 연탄 나눔까지 이른바 봉사활동이라고 불리는 활동들에 많은 시간을 쏟은 이유를 말하라면, 봉사활동이라는 매개 없이는 만나기 어려웠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고, 봉사활동이라는 매개 없이는 알 수 없었을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그 기회가 소중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나의 첫 봉사활동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 수발이었다. 소록도에 가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살면서 가장 많은 자유를 양껏 누렸던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난 뒤, 동기들이 빠져나간 학교 앞 동네에서 홀로 공허함에 빠져 허덕이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우연히 인권법 시간에 들었던 소록도가 떠올랐고, 봉사자가 되면 밥 주고 재워준다는 이야기에 별생각 없이 봉사활동을 신청하고 짐을 꾸려 섬에 들어갔다. 그러곤 그곳에 방학이 끝날 때까지 25일간 머물렀다. 일종의 '도피성' 봉사였다. 철저히 나를 위한 동기에서 시작한 도피.


하지만 그 도피성 봉사는 겉멋만 잔뜩 들어 혁명이니 철학이니 떠들던 대학생의 눈을 뜨게 했다. 단순한 이유로 가겠다고 했지만, 막상 낯선 남도의 작은 섬에 들어갈 날짜가 다가오니 많은 걱정이 들었다. 그곳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문둥병'이라 불리던 무서운 병,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것, 소설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의 배경이 된 섬이라는 것 정도였기 때문에 내가 가서 버틸 수 있을지, 가서 폐만 끼치고 오진 않을지 막연히 두려웠다.


온갖 정류장에 다 정차하던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군에 도착하여 다시 배를 타고(당시엔 소록도 대교가 개통하기 전이었다) 도착한 소록도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신체의 끝부분들이 문드러지는 한센병의 특성상, 한센인들의 외모는 우리와 많이 달랐지만, 그들의 일상, 그리고 그 섬에도 분명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심지어 나만 몰랐지 많은 사람들이 이 섬에 살거나 이 섬을 드나들며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집에 있던 자원봉사 수첩 Photo: 우승훈

당시 내가 배정되어 일했던 곳은 노인병동이었는데, 병동을 매일같이 출근하며 할아버지들의 식사와 세면부터 대소변까지 수발드는 일을 했고, 덕분에 할아버지들과도 터놓고 많은 이야길 나눌 수 있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때 무슨 이야길 나눴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즐거웠던 느낌과 다양한 삶에 대해서 들었던 느낌은 남아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이유로 함께 봉사회관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과도 지금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맺었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갑도 을도 없는 그런 관계였다. 당시 봉사자회관 내 사람들의 관계도는 꽤나 복잡했지만, 나는 운 좋게도 다른 봉사자들과 불편하게 엮이지 않을 정도로 딱 머물렀다. 이렇게 첫 봉사활동에서 좋은 기억과 큰 배움을 안고 소록도를 떠난 나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봉사활동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하게 된다.


소록도에서의 한 달여를 시작으로, 다양한 봉사활동을 했고, '20대의 나를 키운 건 8할이 봉사활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봉사활동을 좋은 사람들과 더 나은 감수성, 그리고 더 넓은 세계를 얻었다. 나는 이 수확들이 누군가와 경쟁하여 빼았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하며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게 매우 마음에 든다. 나에게 이렇게 큰 성장을 가져다준 봉사활동은 당시의 내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애정을 쏟았던 사람들의 삶에 변화 까진 아니더라도 작은 기쁨이나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도움 정도는 되었으리라 믿는다.



NGO 봉사단의 일, 그리고 활동 잘하기

사실 봉사라는 이름을 달고 해외에서 활동했던 경험은 2주 정도의 단기봉사활동과 1년의 WFK NGO 봉사단 활동뿐인데, 그마저도 프로젝트 매니저 봉사단원(이렇게 써놓고 보니 매우 이상하다. 프로젝트 매니저인데 봉사단원이라니)이었어서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외의 기간엔 인턴이나 프로젝트 매니저 같이 뭔가 직업 같은 직책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봉사라고 생각한 기간이 꽤나 길고, WFK봉사단원이나 봉사단원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누다 보니 '해외봉사활동'은 무엇인지, 어떤 자세로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항상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있다.


나는 KOICA 봉사단 활동을 해본 적이 없고, 그들의 활동 내용은 내가 주로 경험하고 듣는 WFK NGO 봉사단의 활동 내용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NGO 봉사단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자면, NGO 봉사단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활동 스펙트럼은 보육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보조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급식소에서 배식을 하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책임감이 적은 활동부터, 정부나 기업의 후원금을 받아 운영되는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심지어는 속한 사업소의 인사나 재무관리까지 하는 복잡하고 책임이 큰 활동까지 정말 어마어마하게 다양하다.


국내 개발협력 NGO들의 미션과 비전, 그리고 활동 방법이 매우 다양하기도 하고, 이들의 사업자금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는 KOICA나 기업들, 재단들이 인건비 편성에 인색한데 반해 개별 NGO의 재정사항이 자체 자금으로 파견인력을 충분히 채용하고 임금을 지급할 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봉사자'급 NGO 봉사단원부터 직원 내지 관리자급 NGO 봉사단원까지 그 스팩트럼이 넓게 분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팩트럼이 넓다는 건 꽤나 오랜 기간 문제가 되었지만, 나는 이 문제의식이 NGO 봉사단원으로 하여금 진정 '봉사'단원다운 활동만 하도록 제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한다. 봉사활동의 본질은 배움과 연대이니만큼 NGO 봉사단원 개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스팩트럼은 무한정 넓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나는 이들이 어떻게 하면 오래오래 안전하고 의미 있고, 마땅한 대우를 받으며 활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암튼, 누군가 NGO 봉사단원으로 나가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당장에 말해줄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은 어떤 단체에서, 어떤 신분으로 일하 건 간에 공통적으로 연결하는 일을 한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국제개발협력은 우선 스스로와 현지의 사람들, 동료 활동가들을 연결하고, 다양한 유무형의 자원과 현지의 필요를 연결하고 크게는 세상과 세상을, 작게는 마을 사람들을 상호 연결한다.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연결을 잘하기 위해선 오만하거나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이고, 당신이 봉사자건 큰 국제기구의 관리자건 다른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을 국제개발협력 일을 하며 구원자가 되려 한다거나, '선진국'사람으로서 '개도국'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거나, 억지로 이 사람들에게, 이 공동체에 스스로를 각인시키려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국제개발협력이 아니라 식민지배고 침략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는 건전한 애정도 생기지 않고, 그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이해는 상대의 아래 설 때(Under-stand), 그리고 상대와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볼 때(연대할 때) 가능하다. 이건 다른 활동가분께 들으며 아주 공감한 이야기인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막 '나대지 말자'. 우리가 '나대야 할 때'는 오랜 배움 뒤에 찾아온다. 그땐 확실히 '나대'야한다.  


그리고 길건 짧건 활동을 하며 스스로가 너무나도 힘들고 다른 이를 충분히 배려하고 공감할 마음의 여유가 도저히 되지 않을 땐, 현장을 떠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게 좋다. 이건 단순히 남을 돕는 일이 아니라 배우고 연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너무나도 무너져서 다른 이들의 손을 잡을 여유조차 없다면 따뜻한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스스로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내던지진 말자. 당신이 살아서 그곳이 어디든 당신의 자리에서 계속 역할을 해주는 것이 더 오랫동안 좋은 영향력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너무 기본적이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하자면 항상 인사를 잘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현장에서 누구를 만나든, 되도록이면 그곳의 말로 인사를 먼저 건네자. 타향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상대방도 갑작스럽게 만난 외국인이 당황스러울 가능성이 높으니, 내가 먼지 인사하지 않으면 결국 둘 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인사할걸!' 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 인사는 모든 관계의 시작이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인사를 잘합시다.


해외에서 봉사 혹은 국제개발협력 활동을 하는 게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간만큼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뭐든 배우겠다, 나아가 이들과 나란히 서 보겠다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이, 그리고 운이 좋다면 내가 함께한 공동체의 삶이 바뀌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비와 주거비가 지원되는 WFK NGO 봉사단 제도를 통해, 배우고 연대하는 기회를 잡아보는 건 어떨까?


현재 많은 기관들이 올 3월부터 내년 2월까지 1년 동안 (아마도 연장 가능) 각국에서 활동할 NGO 봉사단원을 모집하고 있다. 채용공고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 가능한다. (마감임박!) http://recruit.incruit.com/ngovol/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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