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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Apr 30. 2016

4월에 만난 네 사람

가라앉는 배 안에서 웅크리고 있지 말라




4월 징크스가 있다. 편집증세가 도져 끼워 맞춘 면도 없지 않겠지만 7~8년 전부터 유독 4월이 힘들었다. 낮과 밤의 기온이 사막처럼 벌어지고 면역력이 떨어진다. 낮에는 에어컨, 밤에는 전기장판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한다. 새 시작을 하는 3월의 긴장과 각오는 조금씩 느슨해져 간다. 뭐든지 될 것 같은 설렘과 희망으로 조금은 흥분되어 있던 새해의 1분기를 마친다. 냉엄한 현실과 욕망의 간극을 깨닫고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타협점을 잡아가는 2분기 첫 시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2년 전, 온국민에게 분노와 우울을 앓게 했던 부끄러운 그 사건 또한 4월 한 달의 반환점을 막 돌고 나오는 날에 일어났다. 개인적인 아픔과 번민도 유난히 심했다. 올해는 짐짓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3월의 다음 달, 5월의 전 달에 불과한 순서상 네 번째 달인 걸로. 그것뿐인 걸로.


인생의 전부는 리액션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 상대에 대한 반응,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와 주위환경 그리고 바꿀 수 없는 조건을 대하는 나의 반응으로 채워가는 것이 전부라는 확신이 드는 요즘이다. 비슷비슷한 상황에서도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따라 인생은 사람 수만큼 다양한 거다. 우리가 살아낸 오늘 하루 역시 내 일상적인 사건과 일정, 사람들에 대한 내 반응이 전부다. 상사의 꾸중으로 오늘 하루를 망친 것은 사건 자체(상사가 나를 몰아세움)가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좌절, 분노, 위축, 무기력)과 드는 생각("왜 나만..", "때려치울까? 이번엔 진짜..", "이번 달만 버티자.. 내 카드값..", "술 땡긴다..")같이 순전히 나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반응이 만들어 낸 거다. 똑똑하기만 한 알파고가 아니라 감정을 느끼고 제각각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인간이기에 자극에 대한 리액션으로만으로 하루가 채워지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올 4월은 나의 리액션이 나약했다. 객관적인 사건과 사실 그 자체는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힘든 사람, 더 상황이 좋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을 테니 어리광부리는 소리 낼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한 나의 일련의 반응들이 미성숙했고 건강하지 못했다. 작은 일에 크게 반응하고(마이너스적으로) 큰 일엔 더 크게 반응하며 올 4월을 보냈다. 스스로 만든 징크스의 더 높은 완성도를 위한 장인정신이 유난히 돋보였다. 깊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나 자신에게 어떠한 탈출 명령도 내리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네 개의 불빛이 번쩍였다.



#장면 1

4월 23일 오후, 헤어디자이너 조수

머리를 자르러 자주 가는 헤어숍에 들렀다.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주시는 분 옆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분이 늘 서 계신다. 여성 디자이너 선생님이 집도(?)를 하면 그 조수로 보이는 분은 내 코에 간질간질 얹어있는 머리카락을 스펀지로 슥슥 떼어 주시거나 머리를 감겨 주시는 일을 한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번에 조수분을 만난 건 3번째였고, 그동안 잠깐씩 단답형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게 전부다. 이 날은 디자이너 선생님이 다른 고객의 머리를 손보러 자리를 비운 시간이 많았다. 내 뒤쪽 오른편에 서 있던 그는 무료해 보이는 날 위해선지 자리를 지켰다. 그러곤 전신 거울 속, 커다란 아이보리빛의 보자기로 앉은 채로 포획당한 나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훈: 저 어제 예비군 동원훈련을 다녀왔거든요. 거기서 예비군 아저씨들끼리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좀 느낀 게 많았어요.
나: (처음 해 본 본격적인 대화에 약간 당황하며) 아, 그래요? 뭘 느끼셨길래..
주훈: 저보다 어린 23살, 25살 이런 사람들이 다 사장이더라고요. 한 사람은 큰 카페 사장이고 또 한 사람은 강화유리 생산하는 업체 사장이래요. 제가 올해 스물다섯인데, 다들 자기 사업 얘기하는데 전 그동안 뭐했나 싶더라고요.
나: (... 나돈데)
주훈: 제가 사는 동네가 의정부인데 의정부에 제 카페를 하나 열고 싶어요. 무알콜로 된 칵테일을 파는 카페인데요. 여성들 취향으로 잘 꾸며서 잘 해보고 싶어요. 몇 년 전부터 하고 싶었던 거긴 한데 한동안 일 하느라 잊고 있다가 어제 예비군 갔다 와서 또래 사람들 얘기 듣고 다시 하고 싶어 졌어요.


난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주훈: 제가 제일 친한 친구가 있는데 얘가 공부를 진짜 잘해요. 서울대를 시험 안 보고 들어간 놈이에요. 근데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얘한텐 열등감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있어요. 전 고졸이니까..


그때 디자이너 선생님이 다시 돌아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내 머리칼에 집중되는 10여 분간 우린 말이 없었다. 우리의 침묵은 단지 서비스의 재개로 인한 어른스럽고 당연한 절차로만 볼 수 없었다. 더 있었다 뭔가가. 나도 그도.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걸어 나왔다. 내 카드를 받아 든 그분께 무언가 말해드리고 싶었다.

나: 좀 전에 말하신 꿈요, 제가 응원할게요.
주훈: (... 약간 놀란 듯) 감사합니다. 2년이 걸릴지 3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요. (웃음)
나: 방향이 중요하니까요. 속도보다는.. (너나 제발..)
주훈: 좋은 말씀 진짜 감사해요. 정말..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

나는 내가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가 꿈을 꼭 이루길 진심으로 바랐고 어설프게나마 그에게 전달했다. 몇 번 보지도 않았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나에게 ("더 헹구고 싶은 곳 있으세요?"정도)  세간에선 약점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도, 친구에 대한 솔직한 감정도 드러내 주었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꿈도 이야기했다.  내가 기분이 좋은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의 꿈을 입 밖으로 이야기하여 들어주고 응원해준 사람이 그에게 적어도 한 사람 생겼다는 것.  


"아, 나는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내가 살아있는 것 같다"  를 생생히 느꼈다.


#장면 2

4월 29일 정오, 약국 할머니

생활패턴이 달라졌다. 새벽 세네시에 자던 사람이 일곱 시에 일어나려니 리듬이 엉망이 됐다. 새롭게 시작한 일로 긴장도 많이 했고 할수록 욕심도 생기면서 몸이 조금 피곤했나 보다. 소화도 잘 안되고 더부룩했다. 병원까지 가기는 부담스러운 애매한 수준. 점심시간에 신사의 한 약국에 들렸다. 주위의 높은 빌딩과는 어우러지지 않는 작고 허름한 곳이었다. 약사 같이 보이지 않는 할머님께서 나를 맞으셨다. 마치 내가 오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리신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 저.. 근래에 스트레스도 받고 잠도 잘 못 잤더니 소화가 잘 안돼요.
약사 할머님: 그럼 이걸 드셔 봐요. (드링크형 소화제와 과립형으로 된 약을 꺼내 주신다) 여기서 먹고 가.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이미 병을 따셨다) 이걸 먼저 입에 한 모금 물고 삼키지는 마세요. 그리고 요거 가루를 입에 탈탈 털어 넣어요. 그럼 그게 녹아.


일단 시키는 대로 따라먹자,


약사 할머님: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나도 오늘 아침에 스트레스 받고 혈압 쟀더니 10이 바로 올랐더라고.
나: (입에 남아있는 쓴 과립형 분말을 녹이며) 하.. 스트레스.. 사람 문제셨겠죠?
약사 할머님: 사람 문제지 뭐. 아침부터 며느리하고 남편 때문에 아주 열 받아. 근데 열 받지 말아야 해. 열 받으면 나만 손해야. 그게 맞아. 그니까 손님도 열 받지 마. 즐겁게 살아야 돼. 그저. 나만 손해야.


할머니는 "나만 손해"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분명히 그렇긴 하다.


도시 한복판, 남루한 약국에는 논리 정연한 복약지도법 대신에 따뜻한 진심이 담긴 삶의 처방을 곁들여 주신 할머니 약사가 계셨다. 할머니가 주신 약 한번 먹고 속이 편안해졌다. 요즘 나오는 약이 너무 좋아서일 뿐일까.



#장면 3

같은 날 오후, 12층 소년

아파트 1층, 초등학교 3~4학년 나이의 소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친구들과 뛰어놀다 왔는지 단정한 옆머리가 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12층을 누르는 착실해 보이는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나: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요?


"건물주요", "7급 공무원이요" 같은 답을 기사 속 건조한 글이 아닌 설마 당사자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을까 봐 마음 졸이며 한 질문이었다. 배시시 웃으며 잘 모르겠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12층 소년: 건축 디자이너요.


소년은 잠시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누구든 내 장래희망을 물어봐라. 백번이고 만 번이고 대답해 주겠다" 같은 자신감과 패기가 그 순해 보이는 아이에게서 느껴졌다. 이런 순수하고 맑은 의지와 기개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12층에 가까워 오자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드는게 느껴졌다.


나: 열심히 해요.

12층 소년: (웃어 보이며) 네.


그 친구는 내려서 나를 향해 돌아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12층 소년: 안녕히 가세요.

나: 잘가요.


뭔가 반갑고 기특한 마음에 좀 더 격려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12층은 너무 낮았다.

저 친구 나이적 내 꿈은 뭐였더라.



#장면 4

같은 날 밤, 17층 아저씨

가볍게 뛰려고 집 앞 공원에 나왔다. 앞으로 빠르게 달리면 잡념들이 못 쫒아오겠지. 오랜만에 와 본 공원 한편에는 시에서 설치한 운동기구들이 있었다. 밤 날씨가 아직은 차가워서 그런지 아무도 없다. 스트레칭을 하고 푸시업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아파트 같은 동 17층에 사시는 아저씨였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그 아저씨임을 얼른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정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매우 불편하시다. 좌우측 몸의 불균형이 있어 걸으실 때마다 꽤 심하게 절뚝거리신다. 남이 한걸음 갈 거리를 아저씬 세 걸음에 가신다. 이사온지 일 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이 60대 아저씨를 꽤 자주 봤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재활용품 수거장에서도 주차장에서도 그리고 동네 마을버스에서도 아저씨를 뵈었다. 매일 오후엔 사모님과 산책을 나가신다. 아저씨를 그동안 자주 만났다는 얘기는 그만큼 아저씨의 외출이 잦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저씬 우리를 알아보고 먼저 활기차게 인사해 주신다.


아저씨: 아이고,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저씬 늘 밝으시다.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신다. 우리에겐 쉬운 한걸음을 가기 위해 경직된 몸을 뒤틀어가며 겨우 나아가시는 와중에도 미소를 잃는 법이 없으시다. 지난번 엘리베이터에서도 아저씨 부부를 만났다. 내가 사는 25층과 아저씨가 사시는 17층을 같이 눌러드렸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높은 곳에 사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여름엔 시원해서 에어컨이 필요 없겠어요.
아저씨, 나, 사모님: 하하하 (웃음)
사모님: 하여간 이이는..
아저씨: 이러면서 한 번 또 웃는 거지요. 허허허.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또 남으로부터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어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시는 아저씨. 늦은 저녁, 공원에서도 반색을 하며 나를 알아봐 주셨다.

아저씨: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아저씨는 익숙한 듯 '파도타기'라고 불리는 운동기구에 오르셨다. '파도타기'는 바로 선 상태에서 상체는 고정한 채 하체만 좌우로 움직이는 운동이다. 그리곤 좌우 번갈아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며 스윙을 시작하셨다. 물론 아저씨가 만드는 파도는 한쪽으로만 치우쳐 일었고 반대편 바다는 잠잠했다.


아저씨: 전신 마취하고 이틀 만에 일어나서 몸이 힘들더라고요. 젊은 친구 운동 열심히 하던데 이제 자주 봅시다잉. 허허허.


아저씨의 몸은 분명 주위의 이웃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한 상태일 것이다. 평소의 밝고 활기찬 모습에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의료기기 차량이 단지 안으로 들어와 병실에나 있을 법한 환자용 침대를 우리 동으로 들여올 때나 편찮은 분이었다는 걸 상기하곤 했다.


아저씨: 학생이에요? 몇 학년이에요?
나: 3학년이요.
아저씨: 아이고, 아직 갈길이 구만리네요. 창창하시네. 허허허.
나: (미소)
아저씨: 힘내서 삽시다. 우리. 허허허.


그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를 만나기 전 몇 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푸시업을 계속했다. 이상하게 힘이 났다. 쌩쌩했다.


"좋아! 심리적으로 절뚝거리고 과정상 오래 걸리더라도 앞으로 계속 걷자"

"스스로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주변에 아쉬운 것들은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사시사철 바뀌기 마련이다."


나: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아저씨.


아저씨에게 푹 숙여 인사를 드렸다. 경쾌하게 파도를 타고 계신 아저씨를 향해 내 허리와 고개는 저절로 굽혀졌다.


아저씨: 또 봐요. 허허허.





아저씨는 파도 위 리듬에 몸을 맡기고 계셨다.

흘러가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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