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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녀석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네

by 조영환

고녀석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네 지나고 눈이 한 번 크게 내린 뒤, 나는 고구마를 삶았다. 튀르키예 여행에


입동이 지나고 눈이 한 번 크게 내린 뒤, 나는 고구마를 삶았다. 튀르키예 여행에서 돌아온 지 닷새쯤 되었을까 싶은 어느 날, 겨울로 들어선 계절의 문턱에서, 어수선한 시국과 번다스러운 세상 일은 잠시 밀어 두고, 초로초로(初老)의 글쟁이는 고요한 오후를 고구마 냄새로 채우기로 했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어수선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잡아주는 작은 일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냄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괜스레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뙤약볕 아래, 고구마 줄기는 제멋대로 뻗어나갔다. 잡초는 억세게 자랐고, 뜨거운 태양은 무서울 정도로 강렬했다. 그러나 나는 줄기를 다듬지도, 풀을 열심히 뽑아주지도 않았다. "더워서 그래"라는 핑계로 방치한 밭이었다. 자유롭게 자라도록 내버려 둔 고구마는 오히려 나보다 더 꿋꿋하게 여름을 견뎠다.


여름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맹렬한 태양도 가을바람 앞에서 물러갔다. 그리고 그 고요한 가을날, 나는 흙을 헤집어 고구마를 캐냈다. 크고 묵직한 고구마 대신 작고 야윈 녀석들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고구마 한 뿌리 한 뿌리를 손에 쥘 때마다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하는 작은 위안처럼.


고구마는 손주들과 캠핑할 때 가장 빛났다. 숯불에 얹은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는 동안 아이들은 고구마가 더디게 익는다고 보채는 투였지만, 이내 달콤한 향기에 눈을 반짝였다. 손주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여름의 더위쯤은 또 하나의 추억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고구마를 다시 삶고 있다. 뚜껑을 열자 폭신하고 달달한 향이 퍼졌다. 이 야윈 고구마가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얼마나 애썼을지 생각하니, 먹기 전에 한 번쯤 대견하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뜨거운 여름과 맹렬했던 태양이 모두 이 고구마 안에 녹아든 듯하다. 그 혹독한 여름이 이토록 맛있는 겨울로 남았다니, 고녀석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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