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환 Feb 14. 2024

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낭만적인 바다에서 시작되는 여행

버석버석한 감성에서도 말랑말랑한 시상이

바다는 늘 낭만적이다. 매일 해가 뜨고 지며, 매일 붉은빛으로 짙게 물드는 바다는 그렇게 매일 새롭고, 비현실적으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따스한 햇살과 반짝이는 잔물결이 어우러진 5월의 바다는 매일매일 사랑스러운 ‘긴 머리 소녀’와 다름이 없다. 금방이라도 긴 머리를 찰랑이며 뛰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탐스러운 5월의 바다를 걷는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언제나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낭만적인 바다에서 시작되는 여행이었다.     


어젯밤 시끌벅적하던 구남로 거리에 아침이 찾아왔다. 새벽 5시경, 구남로 거리는 밤과는 사뭇 다르게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홀로 선 한 그루 소나무가 고층 빌딩숲으로 채워진 거리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서있는 거리, 빨간색 어닝천막을 친 커피숍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거리, 해운대 구남로에서 해파랑길 여행 나흘 째를 맞는다.


어제, 그들은 트레킹을 마치고 해운대로 내려왔다. 둘째 날 비를 피해 울주군으로 올라가 덕하역에서 출발하여 5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었고, 어제 임랑해변에서 진하해변까지 4코스를 완주한 후 해운대로 내려왔다. 사흘 전 비 때문에 미뤄둔, 해운대에서 출발하는 2코스를 걷기 위해 해운대로 내려와 숙소를 ‘베니키아 호텔 해운대’로 잡은 것이다.


해운대의 밤은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다. 해가지고 나면 화려한 불빛이 도시를 물들이고 해운대는 부드러운 파도 소리와 함께 해수면에 반사된 불빛으로 낮과는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그런 해운대에서 저녁도 먹을 겸 호텔 인근 구남로 거리를 걸으며 전통시장을 구경하였다. 재래시장 골목엔 엄청나게 많은 다양한 먹거리가 숨어있었다. 해운대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구남로 거리는 젊은 사람들로 붐비는 명소였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부터 그들처럼 해운대를 찾은 여행자들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가득한 활기차고 떠들썩한 거리였다. 화려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거리를 따라 반짝이는 물결처럼 수없이 많은 인파가 이어지는 낭만적인 거리였다. 미연과 경희는 액세서리도 착용해 보고, ‘강남스타일’ 안경도 써보며 해운대 여행 즐기기에 빠져들었다. 오삼불고기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9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구남로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던 그들이 다시 차분하고 조용한 해운대의 평화스러운 아침을 맞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반짝반짝 빛나는 젊은 시절이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이 영원할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미 반짝반짝한 청춘을 지나 초로에 접어든 아직 빛나는 대한민국 신청년이다. 유엔에서 정한 기준으로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인생 1막을 힘차게 달려와 눈에 보이는 직장에서 퇴직이라는 플랫폼으로 걸어 나온, 고된 일상의 끝자락 언저리에 와 있다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는, 시곗바늘이 18시 30분쯤을 가리키고 있는, 06시 30분쯤을 가리키고 있는 청년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그런 대한민국 신청년인 것이다.


인생은 결국 적당히 통속적이고 적당히 낭만적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바다와 많이 닮아 있다. 늘 낭만적인 바다도 때론 통속적이니 말이다. 늘 낭만적일 수 없는 바다나 늘 통속적일 수 없는 인생, 그 사이엔 언제나 변화가 있다.


바다는 때로는 거칠게 파도를 일으키고, 때로는 반짝이는 잔물결로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다양한 경험과 도전, 안정과 변화를 맞이하면서 그 안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적당히 통속적인 안정과 안전, 적당히 낭만적인 새로움과 도전을 찾아가는 점에서 바다와 인생은 그렇게 많이 닮아 있는 셈이다.


아침 07시 20분, 그들은 ‘해운대 원조 할매국밥’ 집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꾸려 출발한다. ‘2023 해운대 모래축제’ 준비로 분주한 해운대 해변, 모래를 쌓아 만든 모래조각 작품이 하나 둘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해파랑길 2코스 출발점이다. 신발을 벗어 들고 해무海霧가 얇게 깔린 해변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해운대를 더욱 낭만적인 바다로 만들어 주고, 그런 낭만적인 바다 해운대에서 오늘의 해파랑길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들은 이미 말했듯이 대한민국의 신청년들이다.     


모래조각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며 바다를 바라본다. 모래 위로 밀려오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신선한 바닷바람이 그들을 감싸 안아 주고 있는 해변을 따라 걷는 순간, 도심의 소음과도 같은 번다煩多한 세상만사는 밀려왔던 파도와 함께 바다로 떠밀려 나간다. 그렇게 그들의 거울에 비추어진 해운대의 모습은 그저 신비롭고 평온한,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낭만적인 바다였다.


이런 바닷길을 걸으며 커피 한 잔 하면 딱 금상첨화錦上添花겠지 싶었는데, 딱 그들 앞에 나타난 ‘스타벅스 해운대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마침, 수심회 여사친 선희가 보내 준 커피 쿠폰도 있었으니,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배가 뜨는 법이다. 약속이나 한 듯 ‘스타벅스 해운대점’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밥정 20년, 수심회 여사친 선희, 그녀는 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자기 관리에 꽤 열심인 친구다. 뿐만 아니라 가끔 수심회 남자친구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군기를 잡는 자칭 타칭 군기반장이기도 한, 수심회의 어마무시한 여사친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가 해파랑길 여행을 시작한 친구들에게 커피와 치킨 쿠폰을 보내 응원의 마음을 보내준 것이다.


또 있다. 늘 온화한 미소를 띤 표정으로, 그저 작은 목소리로 경우에 어긋나지 않게 차분하게 바른말을 하는 작은 거인 규철이다. 늘 친구들의 좋은 점을 찾아 이야기하는 그는 수년 전 평생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해파랑길 2차 원정부터 원정대에 참여한 사람 좋은 친구다. 이번 해파랑길 1차 원정에도 금일봉을 랜선으로 보내준 규철의 마음 또한 응원의 마음이고 메시지다.


친구들의 성원이 이와 같으니, 그들은 그저 고맙게 먹고 마셔야 할, 나름 신성한 의무가 생긴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충실히 수행할 신성한 의무는 커피와 후식, 걸으며 간식으로 먹을만한 빵으로 바뀌었다.


해운대엔 이름만 들어도 예쁜 삼포가 있다. 미포(尾浦)와 청사포, 그리고 구덕포를 묶어 삼포라 부른다. 그들이 커피와 간식을 산 스타벅스 해운대점에서 조금 떨어진, 해운대 끝자락 ‘달맞이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 미포다. 미포는 해운대 동북쪽에 자리 잡은 와우산의 꼬리 즉, ‘소의 꼬리에 해당되는 갯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산의 명산 장산에 올라 와우산을 내려다보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 같은 모습의 산이라 하여 ‘와우臥牛’란 이름이 붙은 산, 와우산 끝자락에 붙어 있는 미포는 요즘 부산의 인기 명소, 요즘말로 핫플이다. 미포에서 청사포를 거쳐 송정해변까지 4.8km 구간을 운행하는 해운대바다열차와 해변스카이캡슐의 출발역이 있는 지점이고, 동해와 해운대 경치를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달맞이 공원을 찾는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해와 해운대 바다를 한 곳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미포 철길을 따라 걷는다. 동해남부선 폐철로를 이용하여 해운대바다열차와 해변스카이캡슐이 순환하는 철로 옆으로 만든 보행자 길이다. 미포 철길 중간쯤에서 철길을 횡단하여 다소미공원을 거쳐 달맞이 동산으로 이어지는 너무나 예쁜 이 길은 해운대와 광안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달맞이 언덕으로 이어진다. 버킷 햇,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원철과 경희, 미연이 달맞이 터널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너무나 예쁜 파란 바다는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바다와 하늘의 구분이 모호한 수평선엔 금세라도 ‘신의 영광 ( https://youtu.be/gazwkpG_hsI?si=HmBHZOUJao6l2yFw )’을 찬미하는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림 같은 풍경으로 들어가 하나가 된, 여전히 예쁜 그들의 깊고 아련한 눈에 담긴 푸른 바다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수사를 갖다 붙여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은, 지극히 낭만적이고 심쿵한 5월의 바다였다.


배낭을 메고 ‘달맞이 고개’ 숲길을 오르는 경희의 얼굴에 담긴 표정이 마치 어린아이 얼굴처럼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였다. 5월, 신록에 싸인 숲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시간의 흔적 같은 것이었다. 신록에 물든 나무는 신선한 녹음을 뿜어내며,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가는 가운데 새소리와 나뭇잎들의 속삭임이 어우러져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 위로는 신선한 공기가 가득하고, 발아래의 흙 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산뜻한 녹음에 물든 풀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한창 봄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것만 같은 평온한 마음을 선물로 주는 달맞이 고개 숲길이었다.


같은 길을 함께 걸으며 두런거리는 대화가 이어진 숲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5월의 싱그러움을 선물로 받는다. 숲 속에 쌓인 낙엽에서 올라오는 상큼한 흙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햇살만큼이나 밝은 그들의 미소가 산들바람을 타고 달맞이 고개를 내려간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그렇게 미포에서 달맞이 길로 이어지고, 달맞이 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이어진다.


유난히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청사포 마을은 바다에 기댄, 작은 포구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어촌 마을이다. 해운대 바다열차가 멈춰서는 청사포에 기적이 울리면 고즈넉하기만 했던 마을에 운치가 더해진다.


길을 가다 멈춰 선 미연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난간에 올려놓고 청사포를 내려다본다. 찰랑이는 물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는다. 반짝이는 물결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다. 청사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이미 찰랑거리는 물결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 그녀의 마음에 새겨진 청사포는 그렇게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난다.



청사포에서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선 그녀가

청사포를 내려다본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난간에 올려놓은

그녀의 뒷모습에 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찰랑이는 물결이

그녀의 귓가에 보슬보슬 실비처럼 다가온다.

반짝이는 물결이

그녀의 마음으로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다.


청사포를 바라보는 아련한 그녀의 눈은

이미 찰랑거리는 물결을 따라 바다로 나가고

그녀의 마음에 새겨진 청사포는

그렇게 다시 세상을 향해 떠난다.



청사포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깨알 같은 감성에 젖은 그는 잠시 서서 메모를 하고 다시 길을 따라나선다. 버석버석한 감성에서도 말랑말랑한 시상이 떠오르는 해파랑길이다.


그들이 걷는 길은 이제 송정해변으로 이어진다. 장산萇山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송정 마을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사빈해안이다. 모래톱으로 연결된 육계도인 죽도竹島가 바다로 나가다 멈추어 선 자리에 거북 바위를 떨구어 놓은, 죽도를 벗 삼아 너울거리는 파도가 그리움을 가득 싣고 죽도로 들어오는, 소나무 숲으로 설핏하게 가려진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송정해변이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죽도공원’ 표지석, 그리고 죽도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왼쪽 언덕에 세운 ‘구덕포’ 이정표, 커피 트럭과 오렌지색 포장을 씌운 포장마차, 스마트폰을 열어 뭔가를 찾으며 서성이는 사람들, 죽도공원으로 오르고 있는 여행자들이 어우러진 죽도를 지나자 송정항 방파제에 서있는 빨간 등대가 그들을 맞는다. 정오의 강렬한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빨간색 등대와 흰색 등대가 서로 마주 보고 서있는 송정항, 나지막한 산에 기대어 들어선 마을, 바다향이 가득한 꼬막과 물회를 손님상에 내는 바닷가 식당, 기장해안을 따라 걷는 길은 하나같이 더없이 아기자기한, 요즘 신세대 말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귀욤뽀작 해파랑길이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춘 그들은 공수마을 해안가에 머문다. 지붕까지 이어 얹은 평상에 앉아 참외를 깎아 먹으며 쉬어 가기로 한다. 해파랑길 여행 나흘째, 경희는 발바닥에 붕대를 덧대어 테이핑을 하였고, 미연의 발목은 아스피린 부작용으로 핏줄이 곤두섰다. 그리고 그는 지난 1월 튀르키예 여행 마지막 날 다친 오른쪽 발목에 보호대까지 착용하고 걷고 있는 중이어서 휴식이 필요했다. 그런 그들과 달리 원철은 아무런 이상 없이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미연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갯바위 앞으로 다가선다. 그녀가 바라보는 바다가 더없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그녀를 품어 안는다. 신발을 벗고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그들을 품어 안는 공수해변이다.


기장해안도로를 따라 걸어 맨 처음 만나는 어촌 공수리, 조선 시대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공수마을은 미역, 다시마 양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 부락으로 해안 도로를 따라 형성된 먹장어(꼼장어) 짚불 구이 식당이 밀집되어 있는 마을이다. 해안에서 마을을 올려다보면 낮은 구릉성 산지가 바다로 흘러내리는 지형으로 해동용궁사가 자리 잡은 시랑산이 바다와 접하며 기암괴석이 형성된 수려한 해안 절경으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그들이 걷고 있는 해파랑길은 공수해안길을 따라 마을 안쪽, 시랑산 서쪽 끝자락으로 이어지는 용궁길로 이어져 용궁사에 이르는 길이다. 용궁사에서 시랑산을 끼고 이어지는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며 오랑대까지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 ‘오시리아산책로’이기도 한, 기장 바다를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해파랑길로 접어든 셈이다.


해안 절경을 앞두고 우선 배고픔을 해결하기로 한 그들은 해동용궁사 입구 주차장에 붙어있는, 부산 기장군 기장읍 용궁길 49 1층 ‘청초수물회 부산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아무리 숨 막히는 절경이라도 배가 부르고 나서 봐야 하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옛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그들이다.


식당 외관은 목재를 이용하여 조금은 일식집 분위기였지만 주인장부터 식재료까지 모두 한식집이었다. 식당 내부도 아주 깔끔하였다. 음식도 아주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정갈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물회와 밥, 소면, 미역국, 밑반찬과 견과류를 넣은 검은콩 조림, 산뜻한 맛이 매력적인 백김치, 오징어밥식혜, 물회를 먹고 후식으로 찰떡궁합인 인절미까지 깔끔하게 1인 메뉴로 구성된 트레이에 차려져 나온 물회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먹고, 기분까지 상쾌해진 그가 젊은 주인장께 ‘청초수’ 옥호가 걸린 식당 앞에서 사진까지 함께 찍자 부탁한다. 원철은 물론 경희와 미연도 깔끔하고 개운한 물회 맛에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음식은 주인을 닮는 법이다. 전국에 여러 점포를 두고 있는 '청초수물회'는 체인점마다 아주 미세한 2% 정도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과거 속초 출장이 잦을 때 자주 찾던 본점은 물론 꽤 여러 체인점에서 청초수물회를 먹어봤던 그가 느끼는 2%의 맛 차이는 결국 음식을 차려내는 사람, 즉 맛있는 음식이 닮을 수밖에 없는 주인의 지극한 정성 차이라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맛있는 음식이 혀를 통해 감지되면, 신경 전달체들이 해당 맛을 감지하고 이 정보가 뇌로 전달된다. 이는 맛을 처리하는 뇌의 부분에 의해 조절되며, 다양한 맛과 향이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감각 기관이 음식의 화합물을 해석하고 이를 뇌로 전달하는 과정은 맛과 향을 즐기는 중요한 요소다. 맛을 전달하는 주요 원리 중 하나는 혀에 있는 미각 세포들이 다양한 화합물을 감지하고, 해당 정보가 뇌의 특정 영역에 도달함으로써 우리가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좀 장황한 설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기분 좋은 점심식사를 하였으니, 이제 해안 절경을 따라 걸으며 해파랑길에 빠져들 순서인 셈이다. 그 첫 번째 절경은 시랑산 자락 기암괴석 해안 절벽에 바다를 바라보며 지은 해동용궁사이다. 해동용궁사는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하면 누구나 한 가지 원을 이룬다는 영험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해동용궁사로 들어가는 길 양 옆으로 고만고만한 상점들이 줄지어 이어진다. 예전에 일본 여행 중 보았던 기요미즈데라(清水寺, きよみずでら)로 오르는 골목 상점가 몬젠마치(門前町)를 연상케 하는 해동용궁사로 들어가는 골목의 풍경이었다. 어디에서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왔는지, 외국인 관광객까지 찾은 해동용궁사 경내는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떠밀려 다녀야 할 판이었다. 대웅전 앞마당은 알록달록한 연등으로 가득했다. 다음 주로 다가온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아마도 미리 절을 찾은 사람들인 모양이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다리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도저히 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경내 곳곳에 빽빽하게 걸려 있는 나뭇잎 모양의 금 빛깔 소원지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바닷바람에 살랑거렸다. 미연이 소원지가 걸려있는 곳에서 멈추어 선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솔로탈출!’,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해주세요’, ‘부자되게 해주세요’, ‘로또 1등!’, ‘사랑을 이뤄 주세요’ 등,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로까지 남긴 소원지가 셀 수 없이 많이 걸려있었다. 소원의 내용이 전부 그들의 소원처럼 느껴지는, 그저 평범하지만 쉽지 않아 보이는 소원들이 빼곡히 걸려있는 난간 너머로 황금빛 지장보살상이 바다를 등지고 앉아있었다. 마치 수많은 이들이 소원지에 남긴 그저 평범한 소원들을 이루어 주려는 듯 소원지가 걸려있는 곳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지장보살 뒤로 푸른 바다가 쉴 새 없이 반짝거린다. 지장보살상 앞에 놓인 불전함에 돈을 넣고 합장을 하며 돌아서는 외국인 여성 두 명은 어떤 소원을 빈 걸까?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지장보살 앞에 서있는 할머니는 어떤 소원을 갖고 이곳에 온 것일까? 지장보살 뒤 해안 바위에 쌓은 수많은 돌탑은 어떤 소원을 담고 있는 것일까?


종교와 관계없이 사찰을 찾으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늘 번다煩多한 속세에서 잠시 벗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찰의 분위기에 자신을 맡기는 것에서 비롯되는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곳에서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기원할 수 있기 때문이지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반짝거리는 소원지가 가득 걸려있는 해동용궁사 경내를 빠져나온다.    


시랑대 기암괴석에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그저 평범한 돌이 흩어져 있는 해안을 끼고 국립수산과학원 단지가 들어서 있다. 방풍림으로 구분된 해양수산과학원 단지 울타리 옆으로 난 길은 동암항으로 이어진다. 부둣가를 따라 해물요리를 파는 가건물 식당과 그물과 어구들이 정돈되어 쌓여 있고, 많아야 10여 척 정도 돼 보이는 크고 작은 고깃배가 방파제에 의지한 채 어항에 정박해 있는, 그저 조용한 시랑리 마을에 있는 어항, 동암항이다.


원철과 경희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발목이 시원치 않은 그가 조금씩 뒤처지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는 것이지 싶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그들을 따라 걸으며 동암항을 벗어나자마자 끝도 보이지 않는 눈부신 해안길 오시리아 해안산책로가 펼쳐진다.


산책로와 바다의 높이가 거의 같아 마치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길처럼 보이는, 갯가로 난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며 길 자체가 환상적인 풍경이 되는, 숨 막히는 절경이란 표현이 바로 이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싶은, 오직 푸른 바다와 쪽빛하늘 사이로, 오직 하나의 길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한 풍경이 된 해파랑길이 펼쳐진다.


너무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길,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낭만적인 바다였다. 경희와 미연이 걸어 들어간,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하나가 된 해파랑길은 그녀들과 만나는 순간, 그렇게 한 폭의 그림에 담긴 풍경이 되었다.


 어찌 이런 절경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오랑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쉬어 가지 않는다면, 자손만대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라며 소나무 숲 벤치에 앉는 그들이다. 붉은빛으로 빨갛게 물든 원철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 그의 시선은 내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미연과 경희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도,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들의 환한 얼굴이 해파랑길에서 또 하나의 풍경이 되는 순간이었다.


길은 늘 어딘가로 이어진다. 그들이 함께 걷는 이 해파랑길도 늘 무한한 희망과 미지의 세계로 그들을 데려다준다. 길을 떠나 얻는 행복은 그들의 여정에 찾아오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길에서 마주한 새로운 모험과 아주 특별한 순간순간을 깨알 같은 작은 행복으로 채우는 순간이었다. 때로는 도심으로, 때로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품으로 인도하는 길을 따라 떠나는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그들의 내면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가능성을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언제나 어딘가로 이어지는 그 길 위에 선 그들에게 소중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수많은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대변항은 해파랑길 2코스가 마무리되는 지점이다. 대변항에 이르자 오징어와 생선 따위를 볕에 말리는 전형적인 어촌의 풍경이 펼쳐진다. 정박해 있는 어선은 출어준비에 분주했다. 고기잡이 나가는 배들은 해가 떨어지면 집어등을 켜고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갈 것이다. 국가어항인 대변항이 있는 무양마을의 풍경이다.


아침에 주차를 하러 이곳에 왔을 때 한창 마을 표지석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말끔하게 ‘무양마을’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던 오후 4시 10분, 그들은 해파랑길 2코스 완주를 기념하며 행복한 사진을 한 장 남긴다. 스탬프 도장도 수첩에 찍고 지도를 살펴본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오전에 3코스를 걷고 오후에 출발하여야 하기에 3코스를 조금 더 걷기로 의견을 모은 그들은 날렵한 은빛 멸치를 조형물로 만들어 세워 놓은 멸치광장을 떠난다. 기장군청까지 걷기로 목표를 정하고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대변항에서 출발하는 3코스는 두메로를 따라 봉대산을 넘어 기장군청, 일광해변, 온정마을을 거쳐 임랑해변까지 공식거리 16.9km, 소요시간 6시간 코스로 기장군청까지는 약 4km의 거리이다. 낮은 산이지만 봉대산을 넘어야 하고, 이미 16km 이상을 걸은 터라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하여 기장군청까지 가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는 코스였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신청년 아닌가?


이미 두메로를 지나 봉대산 등산로로 들어선 그들이다. 그러나 숲길은 싱그러웠지만 그들의 상태는 싱그럽지 못했다. 비탈길을 올라오는 원철과 경희, 미연의 표정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발목 부상으로 보호대를 착용한 그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지진모습을 보이면 기장군청까지 걷기 쉽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었다. 지도를 열어 보니 산자락 끝으로 난 등산로인데, 이제 막 정상으로 오르는 초입쯤 올라왔을까 싶은데, 월전마을과 봉대산 정상으로 길이 나누어진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월전마을이었고 좌측으로 오르면 봉대산 정상이었다. 빨간색 해파랑길 표식이 보이지 않아 잠시 월전마을 방향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 봉대산 정상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그는 30~50여 미터 간격을 두고 그들을 이끌며 앞서 봉대산으로 오른다. 신기하게도 아팠던 발목이 비탈길을 오르면서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40여분을 오르고 나서야 해파랑길 리본이 매달린 이정표가 나타난다. 그제야 표정이 밝아진 경희와 미연이 이정표에 서서 사진을 한 장 남긴다. 준비해 온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한 그들은 다시 산길을 내려간다. 잠시 후 저수지가 보이고 10여분을 더 걸어 기장군청에 도착한다. 해는 서산으로 바짝 기울어져 있는 시간, 오후 6시 20분 기장군청에서 그들의 오늘 여정을 마무리한다.


기장군청에서 택시를 타고 다시 대변항으로 돌아온 그들은 기장의 별미 ‘짚불장어구이’로 오늘 하루 너무나 수고한 그들 자신을 위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해파랑길 3코스 시작지점 근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203-13 ‘대변 장어구이’ 식당에서 멸치회와 장어구이에 소주를 한 잔 곁들여 맛있는 기장의 별미로 그들 만의 만찬을 즐긴다. 하루가 힘들었던 만큼 음식도 달았다. 소주도 한 순배 돌았고 그들의 얼굴도 한층 붉게 달아올랐다. 낯선 고장이지만 하루 여정을 마치고 좋은 음식,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만찬은 하루 여정을 되돌아보며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오직 그들을 위한, 그들 만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알록달록 예쁜 등대와 푸른 바다, 바닷바람에 실려온 다시마 냄새, 비릿한 어촌 마을과 항구냄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청사포를 바라보던 미연의 모습, 오직 바다와 하늘과 길만 있었던 오시리아 해안길로 들어서는 순간 그대로 풍경이 된 경희, 그리고 원철의 익살스러운 ‘아~유!’에 담긴 행복한 모습도, 모든 순간이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해파랑길은 그들에게 과한 포장이 필요 없는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계속)

이전 06화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해파랑길과 행복한 인연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