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환 Feb 07. 2024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해파랑길과 행복한 인연을

아름답고 소박한 소풍에 동참한 선물 같은 하루



경희가 제주 올레길 돌담에 기대어 앉은 사진을 올린다. 16km를 걷고 오후 5시 30분 비행기로 돌아올 예정이라는 소식도 남긴다. 김녕 해변 쪽 올레길 완주 기록도 남긴 그녀가 “빨리 완쾌해서 또 가자요”라고 톡을 남긴다. 


여전히 씩씩한 그녀와는 달리 병원을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그에게 해파랑길 여행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톡을 보냈다. 

미연: 에궁, 치료 잘 받으셔야겠어요. 한 번 망가지면 회복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원철: 그래 완치될 때까지 꼼짝 말고 제대로 치료해라.

미연: 불편해도 단디 묶고 계세요. 훗날 룰루랄라 트레킹 다녀야 하니깐요. 날도 더운데 불편하겠어요. 

영환: 마늘 먹고 인간이 된 곰처럼 참아야겠지… 잘 될라나 모르겄네.


해파랑길 2+3코스를 걸을 때, 튀르키예 여행에서 다친 발목이 결국 도졌다. 한 달은 치료를 해야지 싶은데, 깁스를 한 발목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발목 바깥쪽 전거비인대(anterior)가 늘어나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고성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먼데…, 상당히 치명적인 상황이…, 이제 겨우 시작이나 다름이 없는 시점에 벌어진 셈이었다.


물리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오던 그가 하늘을 한 번 처다 본다. 그리고 깁스를 한 오른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불과 열흘 전, 스틱에 의지하여 걷던 모습이 떠오른다. 누가 보더라도 미련한 짓이었지 싶었던 순간이었지만, 그에겐 그 마저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랬다. 전날 2코스를 마무리하고 3코스 구간인 기장군청까지 약 4km를 더 걸었다. 발목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4일 차 일정을 마친 그들은 대변항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마지막 일정인 3코스 13km는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한 그였다. 발목 상태가 좋지 않으니 무리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날, 장미꽃처럼 화사한 날이 밝았다. 하늘도 맑았고, 바닷가 어촌에서 맞는 아침 공기는 더없이 상쾌하였다. 그러나 그의 컨디션은 화사하지 못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제대로 서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클났네, 어떡하냐, 오늘 걷지 말아야 하는 거 아냐?” 

가방을 정리하고 있던 원철이 매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한다.

“그래도 여까지 왔는데 하는 데까진 해 봐야지…, 좀 왔다 갔다 하면 괜찮아지겠지” 

발을 방바닥에서 제대로 딛지 못하고 엉거주춤 방안을 오가며 괜찮다 말하는 그의 내심은 말과는 달리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해파랑길 1차 원정 4박 5일의 마지막 날 아침이 엉거주춤 밝았다.


기장군청 울타리엔 5월의 빨강 장미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달크리한 꽃향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전날의 피로까지 말끔히 씻어주는 듯했다. 가시 돋친 줄기에서 어찌 저리 예쁜 꽃이 피는지…, 마치 가시밭길 같은 어려움과 힘겨움은 있지만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인생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장미꽃 울타리에 선 경희와 미연, 그리고 원철과 그는 마치 열댓 살 먹은 아이들처럼 밝고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울타리를 따라 활짝 핀 꽃송이처럼 특별하고 아름다웠다. 함께 길을 걸으며 순간순간 행복한 꽃을 피우는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그렇게 5월의 한 송이 장미꽃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오늘 여정은 기장군청에서 시작하여 임랑해변까지 약 13km를 걷고 춘천으로 복귀하는 일정이다. 어제 2코스를 걷고 추가로 봉대산을 넘어 기장군청까지 걸었던 터라 그리 어려운 구간은 없는 일정이다. 기장경찰서를 지나 일광해변부턴 임랑해변까지 바닷가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아침 햇살이 차분하게 들어오며 눈을 떴을 때,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다리로 걷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는 결국 친구들의 응원과 스틱에 의지하며 천천히 발을 디뎠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풀며 준비 운동하는 기분으로 기장 경찰서를 지나 일광 교차로에 다다랐다. 도로를 벗어나 작은 하천을 끼고 조성된 데크길을 따라 일광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가올 행복한 순간을 기대하며 천천히 쉬엄쉬엄 걸을지 언정 포기하지 않고 걷기로 한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어느덧 일광 해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또 다른 길이 그들 앞에 놓여있었고, 그 길 위에 그들이 그렇게 당당히 서있었다.


철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바닷가 해변, 철 이른 5월의 일광해수욕장은 빈 모래사장뿐이었다. 간간이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외로움마저 느껴지는 해변 모래사장에 기대어, 배의 선수부분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선상무대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침 9시 25분, 기장군청을 출발하여 1시간 남짓 걸려 일광해변에 도착하였다. 조금 이른 아침이긴 했지만, 해상 날씨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늘도 조금은 뿌옇게 흐려 있었다. 둥그렇게 이어진 모래사장이 아름다워 일찍이 1930년대에 해수욕장으로 정식 개장된 일광해변이다. 정몽주, 이색, 이숭인을 비롯한 선현先賢들이 유람했던 절경이었다고 한다. 


바닷가에 설치한 어부사시사’의 풍류객 고산孤山 윤선도의 일화를 소개한 안내판을 잠시 읽어 본다. 돈으로 유배를 풀 수 있었던 당시 제도 속전을 물고서라도 윤선도의 유배를 풀고자 했던 동생의 제안을 거절하고 지은 시 ‘증별소제 이수’를 소개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 ‘지국총지국총 어사와至菊叢 至菊叢 於斯臥’란 글귀를 들어 본 적 있다. 요즘말로 말하면 ‘찌그덕 찌그덕’ 노를 저을 때 나는 소리와 ‘어기야, 어영차’라며 힘을 돋우며 노를 젓는 어부의 노 젓는 모습을 한자로 표현한 의성어 정도이지 싶은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바로 이 ‘지국총지국총 어사와’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고전 선생님께서 ‘배를 띄우고 노를 젓는 어부, 한가한 어공의 풍류’를 표현하는 특유의 억양을 넣어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실 ‘어부사시사’는 바다에 기대어 사는 어부의 사계를 시조로 읊은 노래이지만, 오랜 유배와 벼슬을 버리고 완도와 보길도에 은거하며 곧은 선비의 기개를 지키고자 했던 윤선도 자신의 삶을 비유한 노래이다. 


그가 기억하는 윤선도는 그런 올곧은 선비였다. 그런데 윤선도의 그런 올곧은 면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증별소제贈別少弟 2수(작별하는 동생에게 증정한 2개의 시)’가 이곳 일광해변에 새겨져 있었다.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혈육의 정을 느낀다.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비로서의 기개를 꺾지 않고 올곧게 살았던 윤선도였다. 이 시에는 선비로서의 윤선도와 혈육의 정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 윤선도가 숨김없이 표현되어 있었다. “아마비비여마지(我馬騑騑汝馬遲) 내 말은 분주하고 네 말은 더디건만” 구절에서 그는 잠시 읽기를 멈추었다. 당시 죄인이었던,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윤선도의 안타까운 동생과의 작별과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 구절이지 싶었다. 


약명신천격기산 若命新阡隔幾山

명(命)에 따른 유배길[新阡]은 수많은 산 너머요.

수파기내난생안 隨波其奈赧生顏

세파를 따르자니 부끄러운 얼굴 어찌하리오.

임분유유천행루 臨分惟有千行淚

헤어지자니 천 가닥 눈물이 흘러내려.

쇄이의거점점반 灑爾衣裾點點斑

네 옷자락에 점점이 얼룩져 적시는구나.

아마비비여마지 我馬騑騑汝馬遲

내 말은 분주하고 네 말은 더디건만

차행나인물추수 此行那忍勿追隨

이 행차에 어찌하여 차마 따라갈 수 없는가

무정최시추천일 無情最是秋天日

가장 무정한 것은 가을의 시간으로

불위리인주소시 不爲離人駐少時

이별하는 사람을 위해 잠시도 머물지 않구나.


그가 읽고 있는 이 시는 1616년(광해군 8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고, 1618년(광해군 10년) 다시 기장으로 이배移配된 후 삼 년이 지난 1621년(광해군 13년) 기장 삼성대에서 동생과 작별하며 쓴 시였다. 해파랑길을 여행하며 윤선도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일광해변을 품고 있는 이 마을은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삼성마을이다. 삼성三聖이란 마을 이름은 신라의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 세 성인이 다녀간 곳이라 하여, 또는 고려 시대의 성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 그리고 이숭인李崇仁이 찾은 곳이어서 삼성대라 칭하고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이색은 포은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吉再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 조선 건국의 근간이었던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길재 등 거의 모든 신진사대부들을 키워 낸 성리학자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41번지, 목은 이색의 생가터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들은 선상무대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윤선도의 안타까운 심경이 배어 있는 일광해변을 떠난다. 그리고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는 이동항으로 들어간다. 


미역냄새가 부둣가에 가득했다. 한창 미역을 말리느라 분주한 손을 놀리고 있는 어촌 사람들이 해를 등지고 미역을 뒤집어 주느라 허리를 잔뜩 굽히고 엎드려 있었다. 이동항 부둣가는 그렇게 온통 미역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안마을의 적당한 바닷바람과 햇볕, 허리를 굽혀 일하는 어민들의 손길이 기장미역을 만들어 주는 셈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역은 고소하고 신선한 맛으로 영양가 높은 고품질 미역으로 소문난 ‘기장미역’이다.  


부둣가에 널어놓은 미역을 보느라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경희는 허리를 굽히고 자세를 낮추어 들여다본다. 한 올 한 올 널어놓은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햇볕과 바람에 조금씩 말라가는 미역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 옛일이 하나 떠오른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미역국을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산후조리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던 미역국, 큰 아들을 출산하고 미역국을 먹어야 할 아내가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 비위가 약했던 아내는 평소에도 생선과 고기류를 전혀 먹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큰 애를 낳고도 미역국을 먹지 못하였다. 그런데, 워낙 미역국을 좋아했던 그는 아내가 먹어야 할 미역국을 숟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후룩후룩 들이마실 정도였다. 지금처럼 산후조리를 조리원에서 하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시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입도 대지 않고 그냥 물리는 것이 미안하고 송구스러웠던 아내에겐 자칭 흑기사였고 철없는 남편인 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어머니가 봤을 땐 그저 ‘아이고! 철없는 내 새끼’였을 것 같다. 물론 나중에 어머니께서 알게 되셨던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 아내 대신 먹었던 미역국 맛은 잊을 수 없다. 지금은 그 마저도 조약돌을 하나하나 쌓아 놓은 것 같은 그리움이 되었지만, 그에게 미역국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젊은 시절 아내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특별한 음식이었다.


이동항을 떠나 잠시 도로가 갓길로 이어진다. 흰색 실선으로 보차도가 구분된 갓길이어서 안전에 유의하며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 길이었다. 일렬종대로 이동한다. 원탁과 의자가 비치된 쉼터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쉬어 간다. 양말을 벗고 후끈후끈 달아오른 발목을 식혀주고 주물러 준다.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따라 마시며 10분을 쉬었다 가기로 한다. 갓길 구간을 통과하자 길은 소나무 숲을 따라 데크로 이어진다. 


그런데, 아뿔싸! 커피를 담아왔던 보온병이 배낭에 없다. 쉼터에 빠뜨리고 온 모양이다. 원철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온병을 찾아왔다. 발목이 아픈 그 대신 우리의 ‘철각’ 원철이 바람처럼 갔다 온 것이다.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진다. 온 신경이 발목에 가 있다 보니 자꾸 실수를 한다.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훨씬 상쾌한 느낌이었다. 도로가를 걷다 들어오니 더욱 그랬다. 피톤치드 영향이지 싶다. 상쾌한 공기가 좋았고 더위도 식히기에 그만이었던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오고 해변 가까이 붙은 길을 따라 걷는다. 인적은 드물고 한적한 길이다. 자맥질을 하고 있는 해녀들의 숨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해변, 기장군 일광면 동백리 해변이다. 해안가에 크고 작은 바위가 솟아 있다. 지형적으로 바위가 많아 해저 바위틈에 해산물이 풍부할 것 같았다. 해녀들의 해산물 밭일 것 같은 바다였다. 그러나 채취는 그리 용이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해안가를 걷는 내내 휘파람 소리 같은 해녀들의 숨비 소리가 들려오는 해변이다. 내륙에서 나서 자란 그들에겐 쉬 볼 수 없는 해녀들의 모습도 이색적이었는데, 숨비 소리를 이처럼 가까이서 들어본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어차피 발목이 아파 속도를 내지 못하던 차에 천천히 걸으며 동백리 해안가의 정취에 빠져든다. 그리고 11시 15분쯤 동백항에 도착한다.


동백항, 바람이 살랑거리는 한적한 어촌마을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쪽빛 하늘과 바다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마을이었다. 그들은 동백항에 마련된 정자를 찾아 원 없이 바닷가 마을 정취에 빠져 보기로 한다. 물론 준비해 온 간식과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얼음컵은 필수였다. 경희와 미연이 간식부터 밑반찬까지 이것저것 부족함 없이 챙겨 와 쉴 때마다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바닷가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느껴지는 정자 주변의 풍경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림처럼 이 아니라, 그냥 그림이었다. 아름다웠다. 몹시 아름다운 풍경, 너무 아름다워 숨이 멎을 것만 같은 풍경으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동백항에서 시원한 얼음 맥주로 더위와 갈증을 날려버리는 이 짜릿함, 그야말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순간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었다. 


원철이 두 손을 올리고 다시 한번 ‘아~유!’라 하며 시원함과 짜릿함을 숨기지 않는다. 잔을 모은 그들은 ‘해!, 파!, 랑!, 길! 을 돌아가며 외치고, 그저 간간이 들리는 파도 소리와 살랑거리며 불어주는 바람이 추임새를 넣어주며 그들과 함께하는 순간이었다. 정자를 덮고 있는 처마 끝으로 슬그머니 들어온 파란 하늘까지 그들의 아름답고 소박한 소풍에 동참한 선물 같은 하루였다. 


잠시지만 그들이 행복한 시간을 가졌던 정자는 '동백정'이었다. 너무나도 파란 하늘, 마치 어릴 적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처럼, 동백정도 푸르스름하게 쪽빛 물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쪽빛 물이 드는 동백정과 달리 미연의 발목엔 노란 옥도정기(沃度丁幾)*, ‘요오드팅크' 물이 들어 있었다. 미연의 발목이 심각해 보였다. 울긋불긋 핏기가 역력한 발목에 임시방편으로 포비돈 소독약을 발라주었지만, 크게 효과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 요즘엔 ‘포비돈 요오드’ 사용으로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과거엔 옥도정기라 하였던 ‘요오드 딩크’다. 옥도(沃度)는 요오드 (iodine), 정기(丁幾)는 tincture (팅크)를 일본어로 표기한 말이다. 이러한 일본어의 영향으로 머큐로크롬을 흔히 ‘빨간약’, 또는 ‘아까징끼(←일본어: 赤いヨードチンキ)’라 부르기도 하였다.


쪽빛 하늘이 동백정까지 푸르스름하게 물들이는데, 미연의 발목은 핏기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푸른 바다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지만, 미연의 발목도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백항 풍경과 함께 어우러진 행복한 시간을 놓치지 않고 즐기기로 마음먹으며 걱정은 바다에 부탁하기로 했다. 해파랑길 여행의 고된 여정마다 바다는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위로하는 존재였기에, 걱정을 파도에 실어 보내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치유로 되돌려줄 것만 같았다. 


신평소공원, 바다를 향해 사선으로 뻗어 있는 바위가 제법 볼만한 공원이었다. 이 중 특별한 바위가 하나 있다. ‘윷판대’라는 바위다. 신평소공원에서 2시 방향으로 보이는 바위다. 일명 ‘척사대’라고도 한다. 이 바위엔 재밌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윷판대는 척사대(擲柶臺)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 장수와 왜 나라 장수가 몇 날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윷놀이로 승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바위에 윷판을 칼로 새기고 종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고 저녁이 되자, 왜장이 바다 쪽으로 서서 윷판이 잘 보이도록 깊고 굵게 새기고 있을 때 우리 장수가 이 대(臺)에서 왜장을 발길로 차서 바다에 던져버렸다[擲] 하여 척사대로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바위에 윷판의 흔적이 남아 있어 윷바위로 부르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부산문화역사대전’ 웹 사이트에 소개된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그리고 아래에 출처를 링크한다.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3185


난간에 모습이 조금은 가려져 있지만 윷판대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긴다. 나이는 역시 물리적인 숫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 그들에겐. 윷판대에서 찍은 사진엔 그들의 바다같이 푸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을까 만은 해파랑길 위에서 만난 그들의 해맑은 표정은 금세기 최고의 '마음은 늘 청춘', 아주 짙은 푸른색 ‘심청深靑’이었다.   


윷판대에서 사진 찍을 때 미연은 왜 그의 배를 만졌을까? 어쩌면 그녀는 배를 밀어 넣었지 싶다. 얼른 배를 밀어 넣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배가 너무 많이 나왔다. 등산 다닐 땐 배가 ‘쏘~옥’ 들어갔었는데, 나름 이유는 있겠지만, 이유불문 운동 부족인 셈이다. 단층을 드러내고 비스듬히 바다에 기대어 누워있는 바위 뒤로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신평항 방파제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빨간 등대가 슬며시 그들의 사진 속으로 들어와 짧았지만 부끄러운 순간을 모면케 해 준다. 그러고 보면 미연이 그의 배에 손을 얹은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당황이나 유머스러운 표현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들은 칠암항 부둣가로 들어선다. 건어물 좌판이 줄지어 상가를 이룬 수산시장을 구경하며 칠암항으로 들어간다. 몽골텐트와 파라솔을 펴 놓고 오가는 관광객을 맞는 시골 장날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이 횟집과 장어구이집, 카페가 밀집되어 있는 칠암항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10분경이었다.  


칠암항엔 두 개의 이색적인 등대가 있다. 오른쪽 방파제엔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 그리고 야구공을 모티브로 지은 흰색 등대가 보이고, 왼쪽 빨간 등대는 갈매기 등대이다. 


칠암항은 두 등대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는 ‘오메가(Ω) 일출’ 명소다. 일출 풍경의 가장 중요한 조연은 갈매기다. 갈매기 등대의 둥근 원형 구조물 안에 갈매기 세 마리 모습이 보인다. 저 원형 구조물 안으로 해가 들어온다면, 갈매기 세 마리가 떠오르는 태양을 안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흰색 야구등대와 갈매기 등대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은 그 어느 곳에서 보는 일출보다 강렬하게 느껴질 수 있지 싶은 칠암항 일출 광경을 상상해 본다. 


한낮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일출은 볼 수 없었지만, 상상력을 극강으로 높여 잔잔한 물결 위로 떠오르는 강렬한 태양을 상상해 보는 그였다. 


야구 등대를 보며, 또 한 명의 수심회 여사친이 생각난다. 과거 젊은 시절엔 대청봉은 물론 공룡능선까지 넘나들었던 친구 재선이다. 그녀는 엄청난 야구팬이다. 야구 중계가 있는 날이면, 친구들과 모임도 시간 맞춰 끝내고 야구를 보러 가는 친구다. 재선이 여기에 왔더라면…, 정말로 좋아했을 것 같았다. 


이 등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신화를 만든 한국 야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등대다. 롯데 자이언츠의 부산이 낳은, 우리 시대의 야구 히어로 고 최동원 선수를 기리는 추모관도 있다. 


칠암항 부둣가도 미역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붕장어로 유명한 칠암 마을 앞바다의 바위는 유독 검은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칠암漆岩 인가? 우리나라 지명 중 ‘칠’ 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게 옻 칠(漆)를 쓰는데, 칠암 마을은 일곱 칠(七) 자를 쓴다. 아마도 예전엔 칠암(漆岩)으로 쓰기도 했을 것 같다. 마을마다 좀 다르긴 해도 일곱 칠 자를 쓰는 경우 칠성 신앙의 대상을 표현하여 붙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칠성암(七星岩) 따위다. 


아무튼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칠암항을 떠난다. 녹조류가 붙어있는 갯바위에 바닷물이 밀려왔다 빠져나간다. 희끗하게 보였다 다시 거뭇해지는 갯바위에 바닷새들이 내려앉는다. 푸른빛 스펙트럼이 일렁거리는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바다와 하늘 사이에 엷게 깔려 있는 흰 구름과 빨간 등대까지, 그야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예쁘고 환상적인 칠암항 풍경이었다. 


칠암항을 떠나 임랑해변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에 한 줄기 바람이 살랑거린다. 미연의 붉은 와인색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반짝이는 햇살이 바다로 내려앉는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던 경희와 원철이 너무나도 푸른 바다에 매료되어 ‘더 이상 진행이 안되네, 진행이 안 돼!’라고 말하며 갈 수 없다 한다. ‘그럼, 바람이 데려다주겠지’라고 말하며 그도 가던 길을 멈춘다. 그렇게 임랑 해변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여정은 너무나도 숨 막히게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이 그려준 풍경으로 순탄치 않은 시련을 맞게 된다. 시간은 이미 12시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시간은 시간이고 풍경은 풍경이니 어찌하랴, 멈추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겠지’라며 절경에 끌리어 바다를 바라보며 머무는 그들의 모습은 해파랑길 위에 그대로 새겨진다. 


임랑 해변으로 들어가는 어귀엔 ‘박태준 기념관’이 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임랑해안길 1 박태준 생가에 건립된 기념관이다. 우리나라 철강산업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청암靑巖 박태준 회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21년 12월 14일에 개관하였다 한다.    


‘박태준 기념관’을 지나자 그들에게 가장 반가운 식당이 눈에 띈다. ‘윤식당’,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해안길 15-6에서 손칼국수와 보리밥을 손님상에 내는 소박한 식당이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간다. 벽에는 다녀간 손님들이 남긴 메시지가 가득하다. 먼저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 진한 쪽파향과 함께 오징어와 조갯살, 고추, 당근 등 야채의 풍미가 솔솔 느껴지는 파전은 그야말로 막걸리와 찰떡궁합이었다. 이어서 나온 칼국수 또한 진한 멸치육수 맛이 그만이었다. 칼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사실은 먼 길을 걸어와 덥기도 하여 시원한 열무국수가 먹고 싶어 들어간 식당인데, 아직 열무국수를 개시하지 않았다 한다. 우연히 들어간 집이지만, 일생일대의 맛집이었다. 아무튼 사실상 오늘 여정의 끝 지점인 임랑 해변 칼국수 맛집에서 해파랑길 3코스 완주를 자축하며 막걸리 잔을 부딪치는 그들에겐 완주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던 식당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임랑해변으로 나간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해변을 뛰어다니며, 잠시지만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곳엔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파도를 따라 뛰어가는 천진스러운 경희가 있었고, 두 팔을 벌려 푸른 바다의 품으로 안기는 미연이 있었다.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만큼이나 환한 웃음으로 가득한 원철과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그런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열심히 사진으로 담는 그가 있었다. 그리고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모래, 해변가로 밀려오는 산뜻한 바닷바람과 여전히 신선한 바다향기가 그들을 안아 주었다.


그들은 닷새간, 오륙도에서 출발하는 1코스에서 5코스까지 약 100km를 걸었다. 3코스 끝점이자 4코스 시작점에서 4박 5일간, 너무나도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될 해파랑길 여행을 마치고 귀향길에 오른다. 


해파랑길 걷기 여행은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에 비하여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여정이다. 그저 천천히 걷는 여행이기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많은, 빠르게 달리면 절대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숨어있는 풍경들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여행이다. 


천천히 걸으며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 귓가에 들리는 작은 소리, 고즈넉한 어촌마을,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연, 손끝으로 만져지고 느껴지는 풍경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곳에서 삶과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해파랑길과 행복한 인연을 맺는 여행이다.  


한 발자국씩 걸어가며 부딪치는 돌멩이는 마치 삶의 작은 도전과 함께하는 소소한 즐거움이고, 귓가에 들리는 작은 소리는 고요한 마음을 담아낸다. 고즈넉한 어촌마을에서 이미 사라졌던 문학적인 감성이 깨어나고, 아름다운 자연은 언제나 버석버석한 마음에 벅찬 감동을 채워준다. 손끝으로 만져지고 느껴지는 풍경은 늘 소중한 순간이고 영혼을 다독인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은 잊었던 꿈을 찾아주고, 삶과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과 만남은 곧 그들의 삶이고 일상이었기에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으로 쌓여간다. 그런 행복한 순간들이 모이고 쌓여 해파랑길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미연, 경희, 원철과 함께 나란히 걸으며 임랑 해변을 떠나는 그는 지난 나흘 동안뿐 만 아니라 앞으로의 해파랑길 여행에서도 소소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며 특별한 선물 같은 여정이 될 것이란 예감을 안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그러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 작은 걷기 여행이 버석버석한 삶에 더 많은 의미와 풍요로움을 더해줄 것이란 믿음이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계속)

이전 05화 여전히 예쁜 그들을 닮은 해파랑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