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 (Topkapı Sarayı, Topkapı Place) [2]
톱카프 궁전 첫 번째 정원을 둘러본 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전시된 수많은 유물을 둘러보기에 주어진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긴 너무나도 많은 유물을 한 점 한 점 꼼꼼히 본다면 하루를 꼬박 본다 하여도 부족한 시간은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여행 중 박물관 관람은 늘 시간이 부족하기 마련이지만, 유물 하나하나마다 얽혀 있을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행복한 여행이 된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단상
여행은 사람들의 일생과 매우 많이 닮아 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여행과 같은 일이다. 현시점에서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나름 목표를 정하여 부지런히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고 겪게 되는 인생사,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때론 궤도를 벗어나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려오곤 하는 인생사가 차곡차곡 쌓여 한 사람의 일생이 만들어진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목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늘 불확실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는 늘 가까이에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때그때마다 벗어난 궤도를 바로잡으며 혼신의 힘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여 살아온 그 과정 또한 여전히 아름다운 삶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 아름다운 삶의 일부 또는 전부일 수 있는 그 길에서 만났던 기적 같은 사랑과 새로운 생명과의 만남은 늘 경이로웠으며, 때론 가슴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벅찬 희망과 깨춤을 추며 겅중겅중 뛸 것 같은 기쁨, 도저히 길이 없을 것 같은 좌절과 감내하지 못할 것 같은 슬픔,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고와 느닷없이 닥쳐오는 환란, 온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은 상실과 뒤틀리고 일그러진 일상으로 곧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과 등 사람이 일생을 살아오며 겪는 온갖 풍상과 희로애락을 담아 놓은 여행 같은 한 사람의 인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는 듯한 박물관 관람을 하면서도 유물마다 얽혀 있을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진진해지는 시간이었다. 과거 수천 년 전 이 땅에 살았을 사람들의 조각상부터 당시 누군가 사용했을 그릇 하나까지, 오래전 사람들의 삶과 새털같이 셀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박물관 여행은 늘 즐거운 일이다. 전시된 유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그 즐거움은 설렘으로 바뀐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고 행복한 여행이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또 하나의 행복을 그렇게 담아가지고 박물관을 나온다.
경의의 문(Babu’s-Selam Orta Kapı)과 두 번째 안뜰
필자는 이제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을 바라보며 서있다. 이 문은 튀르키예어로 Orta Kapı(중간 문, The Middle Gate), Babu’s-Selam 또는 Selamlama Kapısı(경의의 문, The Gate of Salutation)으로 부르는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문이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1468년 메흐메드 2세(Fatih Sultan Ⅱ. Mehmed, 1432~1481)*에 의해 지어진 궁전의 두 번째 안뜰로 들어가는 문이다. 유럽의 성문과 유사한 두 개의 팔각형 탑이 술레이만 대제(Sultan Süleyman 1494~1566)**때 추가적으로 지어지면서 16세기 초 오스만 건축의 고전적인 건축양식이 반영되었고 1524년 Is bin Mehmed는 성문을 철문으로 교체한다. 성문 파사드에 장식된 Al-Kalimah Tawhid(네 번째 칼리마(기도문)***)와 술탄 마흐무드 2세(Ⅱ. Mahmud 1808~1839)의 투구라(tuğras), 측벽엔 1758년 성문의 수리 비문과 술탄 무스타파 3세(Ⅲ. Mustafa 1757~1774)의 투그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문 양쪽에는 문을 지키는 ‘Bewabân-I dergâh-ı âlî”의 초소가 있었다.
안내판의 그림을 참고하면 전통적인 튀르키예 고관들이 썼던 모자를 쓴 사람들이 타고 온 말에서 내려 경의의 문 앞에서 출입을 위해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과거 이 문은 술탄만이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한다. 필자는 오늘 말을 타고 오지도 않았지만, Bewabân-I dergâh-ı âlî의 검색이나 별다른 통제 없이 경의의 문을 통과하고 톱카프 궁전의 두 번째 안뜰로 들어간다.
* 주) 메흐메드 2세(Fatih Sultan Mehmed, 1432~1481)
1444년 8월부터 1446년 9월까지, 그리고 1451년 2월부터 1481년 5월까지 오스만 제국을 통치한 정복자 메흐메드 2세(Fatih Sultan Mehmet)는 첫 번째 통치 기간에 헝가리의 침공으로 세게드 조약(Peace of Szeged)의 휴전이 깨진 후 존 훈야디(John Hunyadi)가 이끄는 십자군을 물리치고, 1451년 두 번째 제위에 올랐을 때 오스만 해군력을 키우며 콘스탄티노플 공격 준비에 들어가 그의 나이 21세인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다. 이스탄불의 파티흐(Fatih) 지구,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다리(Fatih Sultan Mehmet Bridge), 파티흐 모스크(Fatih Mosque)등 오늘날 이스탄불엔 여전히 그의 이름이 남아있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오늘날 튀르키예에 이르기까지 영웅적인 존재이다.
** 주) 술레이만 대제 (I. Süleyman, 1494~1566)
1520년부터 1566년 사망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10번째 술탄으로, 1529년 비엔나 공성전으로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고 베오그라드와 로도스의 기독교 요새와 헝가리 대부분을 정복하였으며, 1501년부터 1736년까지 통치한 이란을 통치한 왕조였던 사파비 왕조와의 갈등에서 중동의 대부분과 서쪽으로 알제리까지 북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을 합병한다. 또한, 오스만 함대는 지중해에서 홍해까지, 페르시아 만을 통과하는 바다를 지배하였으며,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세무 및 형법과 관련된 주요 법제를 정비하고 발전시키며, 문화 예술의 부흥 등 오스만 제국의 황금시대를 연 술탄이다.
*** 주) Al-Kalimah Tawhid
튀르키예어 Kelime-i Tevhîd(Al-Kalimah Tawhid)는 "Allah'tan başka ilâh yoktur Muhammed Onun Rasûlüdür”, 영어로 번역하면 "There is no god but Allah, Muhammad is His Messenger", 우리말로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그의 메신저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네 번째 칼리마인 "타위드(Tawhid)"는 이슬람의 여섯 칼리마(kalima) 중 하나로, 율법에 따라 삶을 사는 무슬림의 선언적인 기도문이라 할 수 있는데, "무함마드는 이슬람 기준으로 알라의 25번째 예언자이자 14번째 사도이다. 꾸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예언자나 사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궁전의 두 번째 안뜰에 설치한 톱카프 궁전의 모형을 살펴본다.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금각만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적인 해자(垓子)를 이용하여 건축된 궁전인 셈이다.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바다 가까이 높은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성벽이 둘러싼 한가운데 궁전이 지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궁전만 따로 볼 수 있는 모형은 두 번째부터 네 번째 안뜰까지 세밀하기 만들어져 돔 건축물 모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건축물의 위치와 용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이다.
두 번째 안뜰은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와 같은, 디반 스퀘어 (Divan Meydanı, Justice Square) 구역이다. 15세기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국정 운영을 위한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제국의회(Dîvân-ı Hümâyun, Imperial Council, 약도 06번), 제국의 재무부 Dis Hazine(Exterior Treasury, 약도 09번)와 궁전 주방 (Saray Mutfakları, Place Kitchen, 약도 02번), 1626년에 지어진 요리사를 위한 모스크(Mosque of the Cooks) 쿡스 마스지드(Aşçılar Mescidi, Massjid Of Cooks, 약도 03번) 등 부속건물 칼라이하네 (아틀리에, 주석 도금 작업장, Kalayhane, tinning Atelier, 약도 04번), Helvahane (Dessert Kitchen, Confectionary Kitchen, 약도 05번), 디빗룸 (Divit Odasi, Inkwell Chamber, 약도 08번)과 술탄의 정의를 나타내는 정의의 탑(Adalet Kulesi, Tower of Justice, 약도 07번)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경의의 문 좌측 정의의 탑 옆에 있는 Kubbealtı, 또는 디반하네(Divanhane, Dome of the Rock) )은 오스만 제국의 고위 관료와 정치가들이 Dîvân-ı Hümâyun 회의를 개최한 곳으로 국정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곳이었다. 전통적인 동양적 공간 개념인 디반 하네는 대화를 위한 일종의 거실이자 리셉션 라운지 공간으로, 오스만 제국의 Kubbealtı는 국사를 논의하는 첫 번째 방 Divan-ı Hümayûn과 논의된 국정 사항과 법률의 승인이 이루어지는 두 번째 방 Divan-ı Hümayûn Pen, 결정된 국정 사항을 기록물과 법률문서가 보관되는 Defterhane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5세기 톱카프 궁전을 건축하며 함께 지어진 궁전 부엌(Saray Mutfakları)은 경의의 문 오른쪽에 열주의 회랑을 따라 지어졌다. 10개의 돔형 건축물로 1574년 발생한 화재로 건축가 Mimar Sinan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이때 20개의 굴뚝이 10개의 돔 전후에 추가된다. 가지런히 이어지는 굴뚝의 규모만 보더라도 상당히 큰 주방임을 알 수 있는데, 매일 4,000-5,000명의 비룬(Birun, 외궁)과 엔데룬(Enderun, 내궁)과 디반-이 후마윤(Dîvân-ı Hümâyun, 황실)의 식사를 요리했던 궁전 주방이다. 매일 약 800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였다 하니 실로 엄청난 규모의 부엌인 셈이다.
두 번째 안뜰 정원 여기저기에 둔, 세월의 흔적이 담뿍 담겨있을 커다란 토기 항아리는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을까? 하나, 둘, 셋, 넷…, 보이는 것 만 세어봐도 꽤나 많은데, 지금과는 달리 과거엔 특별한 용도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용도는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면서 주출입로를 따라 걷는다. 정의의 탑이 세워져 있는 건물 가까이에 다다른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아치형 기둥으로 지지되는 건축물 지붕 아래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벽면 장식을 구경하느라 몰려 있는 사람들이다. 이슬람 특유의 정말 정밀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디빗룸 (Divit Odasi, Inkwell Chamber, 약도 08번) 건물이다. Divit은 잉크를 찍어 쓰는 데 사용되는 갈대 펜의 일종인데, 당시에 사용되던 필기구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디반하네 바로 옆에 지어진, 이스탄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의의 탑(Adalet Kulesi)은 모든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 술탄의 영원한 정의를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서기 5세기경 동로마 제국 때부터 오스만 시대까지 여전히 사용되었던 비잔틴 시대 저수조를 설명하는 안내판도 읽어본다. 두 번째 안뜰엔 석관을 포함하여 최근 발굴 과정에 발견된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한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주요 출입로 일부 구간의 포장을 잘라내고 사방 경계석으로 막아 놓았다. 땅속에 묻힌 과거 동로마 시대의 흔적을 볼 수 있도록 일부 구간 포장을 열어 놓은 셈인데, 얇은 돌을 세로로 세워 수직 강도를 강화한 흔적의 도로와 네모 방정한 돌이 박혀 있는 모양 등 여러 형태의 것이 한 곳에서 보인다. 지극히 일부만 열어 놓은 것인데…, 이 궁전 아래 어떤 것이 있을지…, 잠시나마 어설픈 상상을 해보지만…, 쉽지 않은 궁금증이다. 과거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흔적을 걷어내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궁전을 지었다는 이야기인데, 동로마 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오스만 제국의 심장과도 같은 톱카프 궁전을 지어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제국의 성립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상징적인 건축물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저걸 걷어내고 궁전을 짓기에는 공사비가 상당히 추가되었을 법한, 경제적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으니까.
정의의 탑 옆으로 돔형 천장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스만 제국의 재정과 세무관리와 왕실 재산을 관리한 외부 재무부 (Dış Hazine, exterior Treasury, 약도 09) 건물이 이어진다. 현재는 무기 박물관(Weapons Collection)으로 사용되는 이 건물엔 7세기부터 20세기까지 1,300년간 사용되었던 검, 갑옷, 방패, 헬멧, 도끼, 권총, 단검 등 약 33,000개 이상의 무기들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Sultan III. Selim Nişan Taşı는 술탄 셀림 3세의 표지석 또는 레인지 스톤(range stone)이라고도 하는데, 1791년 세워진 Sultan III. Selim Nişan Taşı는 1920년경 레벤트 농장에서 이곳으로 옮겨진다. 오스만 제국시대부터 사거리 기록을 깬 궁수를 기리기 위하여 화살이 떨어진 곳에 오벨리스크 형태의 돌기둥 Nişan Taşı를 세웠는데, 대부분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지는 이 기념석엔 이름과 날짜, 사거리 등 기록이 새겨진다.
소쿠미 요새 기념비 (Fortress of Sokhumi Monument)는 아흐메드 3세 (III. Ahmed) 때 소쿠미에 지어진 요새로 이곳에 있던 기념비를 1877년 제12차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 전쟁 중 압둘 하미드 2세(II. Abdülhamid)세 톱카프 궁전으로 옮겨온 기념비이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전쟁은 1568년 제1차 전쟁부터 1877년 사실상 마지막 전쟁이었던 제12차 전쟁****까지 근 300년간 이어진 전쟁이다.
**** 주)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도합 13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중략) 오스만-러시아 제12차 전쟁은 러시아가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독립군과 함께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확산된 범슬라브주의에 입각하여 촉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적개심에 의해서 벌어졌다. 러시아는 불가리아 독립군 등의 도움을 받아 가며 발칸을 돌파해 연전연승, 이스탄불 근처, 산 스테파노까지 진격했고 오스만 제국은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때의 패배로 유럽 영토를 사실상 전부 잃어버리고 만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주변을 제외한) 유럽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제1차 발칸 전쟁 때이다.
최초 전후 처리를 위해 1878년 3월에 산 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경계한 영국, 프랑스의 반발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조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베를린 조약을 통하여 전후 처리를 끝맺었다.
불가리아 공국은 독립은 하였으나 영토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에 있어야 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독립국 인정은 되었으나 일부 할양받은 영토를 돌려주어야 했다. 한편 영국은 중재의 대가로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획득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권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동부 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만을 반환받았다. [출처 : https://namu.wiki/w/러시아-튀르크%20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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