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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Jun 28. 2019

파타고니아에서 살아보기

# 그리고 조금 덜 열심히 살아보기

내가 남미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파타고니아에서 살아보기..

파타고니아는 특정한 나라가 아닌, 어떠한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남미 지도를 보면 길쭉하게 뻗은 아래쪽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있고 파타고니아 지역은 그중에서도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 지역을 이른다. 혹시라도 북유럽 노르웨이의 자연을 경험해 본 사람은 파타고니아의 자연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태평양 해안을 끼고 있어서 연중 차가운 바닷물을 갖고 있는 칠레가 연어를 생산하는 것도 세계적인 연어 생산국인 노르웨이와 아주 비슷한 기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두 끝들, 북쪽의 끝과 남쪽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꽤 비슷한 점이 많다. 눈이 시릴 정도의 청정한 자연과, 아주 추운 겨울을 갖고 있는 파타고니아는 사실 여러 번 여행도 와봤었고, 출장으로도 다녀봤었으나, 어느 한 곳에 짐을 풀고 꽤 긴 기간을 머물러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살아보는 것과 여행하는 것의 차이점이지 않을까 싶다. 살아본다는 것은 짧게라도 이 곳에서 나만의 일상을 가져보는 것 일터. 여행지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El Calafate'나 칠레의 'Puerto Varas' 아래쪽도 예쁘지만, 장기간 살아보고 싶었던 곳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칠레 남쪽의 'Puyehue'나, 아직은 가보지 못한 칠레의 'Balmaceda', 혹은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Bariloche'중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겨울 날씨로 인해 여행객들 조차 많지 않은 한산한 바릴로체의 한 식당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이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적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북쪽에 있는 반면 남미는 남쪽에 위치한 만큼, 이 곳의 기후는 한국과 정반대다. 시푸른 호수와 새파란 하늘, 싱그러운 안데스 산맥의 생명력을 보려고 전 세계 여행객들이 몰려오는 이 곳 바릴로체의 성수기는 12월에서 2월 정도라서, 한겨울로 막 접어들기 시작하고 있는 6월은 여행객들도 거의 없다. 어제도 그저께도 나는 산에 올랐으나 구름이 잔뜩 껴있는 데다가 눈까지 너무 많이 와서 풍경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운이 좋게도 잠깐이나마 해가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틈을 타서 본 광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Cerro Campanario
Cerro llao llao
Laguna Moreno

처음으로 남미에서 느꼈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돈을 많이 버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아닌 데도 툭하면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밤늦게 까지 먹고 마시고, 여름에는 온 가족이 한 달을 통째로 휴가를 내서 바닷가에 놀러 갔다 오는 그들의 일상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잘 놀 수 있지?'라는 내 의문의 근본에는 사실 '어떻게 저렇게 설렁설렁 살면서 놀기까지 할 수 있지?'라는 약간의 의아함과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늘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다 보니 특별한 일 없이 보낸 하루의 끝에서는 늘 내면의 죄책감을 마주해야 할 정도였다. 분명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자각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그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고, 근면 성실하며, 아주 생산적인 사람'이 되도록 요구하니까.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참 성실하고, 똑똑하다. 그것은 분명 과거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이었고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주요한 자원인 것은 맞으나,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열심히'사는 것이 당신의 큰 장점이 될 수 있을지 언정, 그것이 당신이 당신으로서 살기 위한 필요조건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의 속도대로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당신이 도달하고 하는 지점까지 이 가장 빠른 길이다.


바릴로체의 버스정류장의 아르헨티나 남자

사실 파타고니아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만의 이상적인 일상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한 번쯤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을 일시적으로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하루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았다.

#자연 #맛있는 음식 #신선한 커피 #와인 #고양이 #음악 #자유로움 #독립적 #여유 #산책 #비나 눈이 오는 것을 따뜻한 실내에서 창밖으로 보기 


최대한 사람들과는 거리를 좀 더 두고 자연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바릴로체의 시내에서도 차로 30분이나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다. 여기에서 친해진 회색 고양이는 밤새 1층에서 자다가 해가 뜨면 내가 자고 있는 2층에 올라와서 나를 깨운다. 처음에는 내 발 아래치에서 이불을 부스럭거리다가 그래도 내가 인기척이 없으면 내 옆으로 와서 앞발로 내 가슴팍을 꾸욱- 누른다. 핸드폰 알람이 아닌 고양이 알람이라니..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 비와 눈이 번갈아가며 내려서 외부에서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도 어려워서 내 하루 일정은 최대한 두 개 정도다. 예를 들면 머무는 곳 근처에 있는 숲길로 트래킹 하고, 집에 와서 장 봐놨던 것들로 점심을 해 먹고, 날씨가 좋으면 근처 언덕에 올라갔다 오거나 그마저도 날씨가 안 좋으면 그냥 난로 앞에서 책 읽고 글쓰기. 무료해 보이는 이 일상도 나름 하루가 빨리 가고 저녁에는 피곤해서 골아떨어진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딱 맞다.


이런 일상을 반복하고 있으니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일상이 막상 직접 해보니 엄청나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과 이 정도 일상은 현실로 돌아가서도 앞으로 종종 내게 허락해 줄 수 있겠다는 마음과, 오히려 이제는 정말 내 속도에 맞춰 '아주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고 하면, 이전에는 무조건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찍 일어났다면 이제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자발적으로 일찍 일어나고 싶고, 이전에 내 선에서 모두 처리하지 못할 만큼의 수많은 이메일들과 전화로 인해 표면적으로 바쁜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정말 집중하고 싶은 분야에서 더 잘할 수 있도록 나를 내면적으로 단련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것.


그 새 비는 몇 번 눈으로 바뀌면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는 아르헨티나 노부부가 다정하게 와인 한 잔씩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있다. 이런 휴식, 이런 시간, 혹은 당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순간들, 미루지 말고 당신의 일상 속에서 마음껏 허용해 줄 수 있는 여유를 모두가 가질 수 있기를.. 지구 남쪽의 끝, 파타고니아에서의 이러한 일상은 내가 꿈꿔왔던 이상적 일상이었다.




당신의 이상적인 하루는 어떤 하루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당신이 현재 '열심히'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당신의 이상적인 일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명제를 가끔은 거꾸로 뒤집어, 당신의 이상적인 일상이 오히려 당신이 매일 반복하는 평범한 일상의 방향성을 점검해줄 수 있는 좋은 나침반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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