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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Oct 12. 2020

서평. 데미안, 헤르만 헤세

책 데미안이 인기가 있는 이유가 어리둥절하다. 알을 깨고 나오는게 이 책의 핵심인데 알 속에 얌전히 있기를 강요하는 사회가 아닌가.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통해 비판적 사고를 시작했고 - 10살이면 훌륭한 나이다 - 에바 부인을 통해 자기 욕망에 충실해야 함을 - 18살이면 박수칠만하다 -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개인의 비판과 욕망을 표현할 자유를 지켜주는가? 여전히 ‘할많하않' 단어가 유행하고, 몇몇 베스트셀러 책 제목만봐도 -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자존감 수업 - 여전히 웃어야 하고, 나대로 살지 못하고, 자존감 낮은 삶을 사는, 즉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청소년기에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이 강렬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선뿐만 아니라 동시에 악의 신)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책에 따르면 나는 나를 둘러싼 알을 깨야 한다! 사회가 도덕을 강조하며 악이라고 규정한 내 안의 욕망까지 끌어안아야 한다! 


하지만 책과 현실은 달랐다. 악을 끌어안기는 커녕 그런 생각을 하면 나쁜 아이이지, 그런 행동을 하면 나쁜 학생이지, 라는 이분법을 직접적인 말로 또는 말이 아닌 분위기로 눈치받았을뿐만 아니라, 그런 임의적인 사회 규범을 스스로 내재화했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올바른 것, 모범적인 것만을 추구하면서 내 세계는 좁아졌다. 이제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쟤는 나쁜 아이구나, 쟤는 나쁜 학생이구나, 하고 마음에 선을 긋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비슷한 친구들만 끼리끼리 놀면서 (내가 보기에) 순수하고 선한 세계는 굳어졌다. 


대학생이 된 이후 다양한 삶, 특히 다른 국가로 여행했을 때 현지인의 생각을 들으며 다양한 생각에 놀랐다. 이거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을텐데? 생각했다. 특히 데미안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책 데미안을 실천하는 그 친구의 생각과 행동에 책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막상 그런 자유로움에 처음에는 끌렸지만 곧, 저렇게 살아도 돼? 저렇게 살다가 어떻게 되는거지? 하며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곧 거리를 두고 데미안이 될뻔한 친구를 거부했다.


그렇게 데미안 후보 하나가 멀어졌지만 데미안을 만날 기회는 지금도, 아니 항상 있다. 데미안은 책 데미안처럼 어떤 친구일 수 있고, 다른 책이나 선생님, 선배, 심지어 후배, 아이일 수 있다. 무엇보다 내 안에 데미안이 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난 자네 내면에 있어"라고 하고, 책 마지막 문장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내 자신의 내면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 내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라고 한다. 


성숙한 싱클레어처럼 내 안에 데미안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지만 여전히 이론과 실천의 격차는 크다. 성인이 되고 나서 다시 읽으니 알을 깨고 나가라는 주제는 다시 상기됐지만 감동은 처음 읽었을 때보다는 줄었다. 책 데미안은 요즘 정신의학, 심리학, 자기개발서에 나오는 그 흔한 말들을 - 내 자신을 인정하라, 내 자신을 표현하라, 내 자신을 사랑하라,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라, 나답게 삶으로써 자유롭게 살아라 - 그 똑같은 말들을 비유와 상징을 통해 서술한 문학이었다. 이론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괴감이 들었다. 


싱클레어 이마에는 (내 생각에) 깨달은 자를 표시하는 ‘표식'이 있다. 임의적인 사회 도덕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할 줄 알고, 남들이 당연히 생각하는 것을 의심할 줄 알고, 종교나 욕망 등 비판은 커녕 대화조차 금기시된 주제에 대해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 표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데미안과 싱클리어, 에바부인이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비판적 사고를 하고 자기 욕망을 인정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아챈다.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표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기 전에 밝은 세상만 봤고, 만난 후 어두운 세상까지 깨닫는다. 나도 어두운 세상을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이제 밝은 세상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반면 실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두운 세상을 끌어안을 용기도 없는, 애매한 상태이다. 나를 둘러싼 알껍데기는 결국 사회가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다. 행동하지 않았던 핑계였다. 불교에서도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것이 있다. 결국 내 안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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