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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n 23.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6

물집에 대한 업을 어제 받았다면 변덕에 대한 업은 오늘 받는 날인가보다. 오늘 날씨는 정말 나보다도 심했다. 해와 비가 5분마다 번갈아가며 바뀌는 듯했다. 우산을 꺼냈다가 우비를 입었다가, 입고, 벗고 한 게 10번도 넘을꺼다. 

- 루이야 비가 많이 오는데 버스 타고 가는 게 어때?

- 안돼. 순례는 걸어서 하는 거야.

제안한게 무색하게 곧 비가 그치자 나도 그냥 걷기로 했다. 비가 변덕을 부리고 나도 변덕심이 생겼다. 지금 루이랑 며 칠째 같이 걷는거지? 남아공 노부부는 둘이 같이 다니는 줄 알았다잖아. 날 챙겨주는 건 고맙긴한데 얘랑 계속 같이 다니면 다른 순례자들과 대화할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닌가?

포르투갈레떼 도시를 벗어나 해안가를 걷기 시작했다. 모래 위를 밟아서 발바닥 통증이 덜 느껴졌다. 육지만 봤으면 지루했을 여행은 여러 모습의 해안선을 보고,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 향기를 맡고, 상쾌한 바닷 바람을 맞으면서 풍성해졌다.

- 안녕. 어디서 왔니?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왔어요. 아저씨는요?

- 나는 스페인 사람이야. 이름이 뭐니?

- 니키요. 아저씨는요?

- 페드로야. 까미노는 몇 번째 하는거니?

- 처음이예요. 아저씨는요?

- 나는 네 번째야.

- 네 번째나요?

-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은의 길, 그리고 이번 북쪽길.

- 왜 또 걸으세요?

- 걷는 게 즐거우니까.

- 걷고 나서 뭐 좋은 일이 생겼나요?

- 걸을 때마다 좋은 일이 생겼지. 하하하. 그래서 중독적이야. 너는 별로니?

- 저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걸까. 남아공 노부부는 두 번째, 독일 집시는 세 번째, 스페인 페드로 아저씨는 네 번째 까미노를 하는데 나는 왜 벌써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까.

- 왜? 

- 너무 힘들어요 체력적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걸은 적이 없어요.

- 혹시 짐을 너무 많이 들고다닌 거 아냐? 옷 몇 개 가져왔니?

- 옷은 별로 챙기지 않았어요. 상의 3개, 하의 3개, 방풍 자켓 1개밖에 없어요. 

- 그 정도로는 무겁지 않을 것같은데. 다른 거 또 뭐가 있어?

- 침낭도 없는데. 아, 화장품이랑 책이 좀 무게가 있어요. 얼굴 탈까봐 썬크림을 부족하지 않게 갖고 왔어요. 피부가 상할까봐 화장품도 넉넉히 가져왔구요. 시간도 많이 있을까봐 책도 두껍구요. 근데 생각보다 팩을 붙이거나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기지 않아요.

- 사람들이 가져 오는 짐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에 집착하는지 보이더라. 

- 제가 화장품이랑 책이 무겁다는 거면…

- 화장품과 책이 너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버릴 수 있겠니?

- 버리라구요? 그걸 아깝게 왜 버려요!

- 하하하. 근데 그 셔츠 독특하다. 왜 얼굴까지 가리는거야?

- 얼굴 탈까봐 귀에 걸고 얼굴까지 올릴 수 있는 셔츠예요.

- 하하하. 썬크림 바르고, 셔츠로 얼굴을 가리고, 썬글라스 끼고, 모자까지 썼네? 

- 햇빛은 좋은데 햇빛이 제 얼굴에 오는 건 싫어요.

- 얼굴에 햇빛 받는게 왜 싫어?

- 타니까요.

- 타는 게 왜 싫어?

- 나이들어보이니까요. 

- 나이 드는 게 왜 싫어? 몇 살인데?

- 나이를 말하기 싫을 정도로 나이 드는 게 싫어요.

- 나이 드는 게 왜 싫어? 자연스러운건데.

- 한국에서는 나이에 따라 기대하는 게 있어요. 이 정도 나이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가져야 하는 게 있어요. 저는 그 기대치에 대해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말하기 싫어요.

- 그 기대치와 다르게 살면 어떻게 되는데?

- 이상하게 보죠.

- 남의 기대치에 따라 살면 행복할까?

- 모르겠어요. 한 번도 남의 기대치를 만족해본 적이 없어서.

-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 사실 제 기대치는 남의 기대치와 비슷해요. 제가 충족하지 못할 뿐이지.

-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어. 타인이 원하는 걸 자신도 원한다고 착각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하나보다, 나도 그걸 원한다, 라고 생각하는데 알고보면 착각이었던거지. 알고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거야. 다들 변호사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지 않았을 수 있어. 다들 결혼하는데 알고보면 나는 결혼에 관심이 없을 수 있어. 별로 원하지 않으니까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도 결혼하기 위해서도 별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걸 능력이 없어서 이루지 못했다고 착각하는거지. 지금까지 무엇을 하지 않았거나 갖지 않았다면 너가 진짜 원했던 게 아니었을 수 있어. 그걸 구분하려면 혼자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번 까미노에서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 내 삶의 목표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 배낭의 무게는 외모와 성공에 대한 집착을 말해주고 있었다. 

날이 개어 하늘도 바다도 새파랬다. 보라색 야생화가 들길을 수놓았다. 보라색은 독특하다. 어디에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꽃병에 놓이기 싫거나 다른 꽃과 함께 하기 싫다면, 들판에 있고 싶고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들판이 아름다워진다면, 야생화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 곳이다.

다시 루이를 만나 알베르게를 찾았다. 알베르게 주인은 까미노 중 보기 힘든 아프리카계 사람이었다. 물어보니 감비아에서 왔다고 한다. 감비아는 잠비아와 다른 국가다. 처음 들어보는 국가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국가라고 한다. 일을 구하기 위해 감비아에서 이탈리아에 갔다가 스페인까지 온 이민자다. 오후 5시쯤 도착했는데 남녀 혼용 16인실 방은 이미 차있었다.

- 여기서 주무시면 돼요.

- 식사하는 곳에서요?

- 저녁에 매트리스를 갖고 올거예요. 옆에 방은 16인실인데 여긴 2인실이라 우린 여기를 VIP룸으로 불러요. 같은 돈 내고 VIP룸을 쓰는거니까 두 분은 운이 좋은거예요. 하하하.  

우리 뒤를 따라 곧 한 명이 더 도착했다.

- 이제 실내 주무실 곳이 없는데 어떡하죠? 밖에 텐트에서 주무실래요?

미국 뉴욕에서 온 마그릿은 텐트에서 자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뉴욕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

- 뉴욕 여자들은 다 ‘섹스 앤 더 시티’처럼 화려하게 살아요?

- 그건 드라마고 현실은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요. 저를 보세요. 추운데 텐트에서 자잖아요. 하하하.

마그릿은 산 세바스티안에서 만났던 미국인 타일러처럼 영어를 가르치는 비자를 받아 스페인에서 2년 동안 살다가 이제 뉴욕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포르투갈레떼 난민 수용소, 아니 알베르게에서 만난 남아공 노부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브라질 세르지오 아저씨도 계셨다. 그 외 여러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대화를 한다는 게 신기했다.

- 저 명상 좀 하고 올게요.

마그릿은 매일 1시간 정도 명상을 한다. 딱히 명상을 할만한 조용한 장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지킨다고 했다. 알베르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거나 자리가 없으면 침대에서 한다고 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가끔 요가도 한다고 한다.


저녁 8시가 되자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먹어도 저녁은 일찍 먹거나 가볍게 먹는 나로서는 스페인 저녁 식사 시간과 그 양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곧 잘텐데 왜 이렇게 늦게 먹으며 왜 이렇게 많이 먹는걸까. 

- 저는 채식주의자라서 고기를 먹지 않아요. 

고기가 주식인 스페인 식사 와중에 마그릿은 육식 대신 채식을 꿋꿋하게 지켰다. 

나도 잠깐 명상과 요가, 채식을 한 적이 있었다. 명상을 하면 흙탕물을 휘젓다가 침전물이 가라앉는 것처럼 표면적인 마음이 정리되고 근본적인 마음을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가 명상하는 것을 중단했다. 어쩌면 페드로 아저씨가 말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명상을 다시 해보는 것도 한 방법인 듯했다. 요가는 운동 차원에서 잠깐 했다가 귀찮다는 핑계로 중단했다. 채식은 육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시작했었다. 해산물은 먹었지만 육식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식사하는 게 불편했다. 왜 고기를 안먹냐는 질문에 대해 도살장의 잔인함 때문이라고 상대방이 고기 먹기 직전에 적절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은 고기 먹는 미개인이고 혼자 채식하는 동물보호 운동가고, 남들은 삼겹살 먹는데 혼자 샐러드를 시키는 유별난 사람으로 오해 받는 게 불편했다. 맛있는 채식주의 음식도 찾기 쉽지 않았다.

뉴욕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사치스럽고 이기적일 것같았다. 한 사람 때문에 한 도시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도 있지만 깨질 수도 있다. 마그릿은 검소하고 겸손했다. 명상과 요가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챙긴다. 남의 시선이나 혀의 감각에 굴복하지 않고 채식주의 신념을 지킨다. 피에르와 마찬가지로 마그릿도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동양사람이 서양사람으로부터 명상과 요가, 채식을 다시 시작해보라고 권유받았다.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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