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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n 27.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라레도 7

혼자 힘으로 도착하려고 했지만 결국 오늘도 도움을 받았다. 여성 두 분 덕분에 라레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니콜 아주머니, 나중에는 벨기에 바네사 아주머니였다. 

오전 7시 조금 전에 출발했다. 나도 유럽 사람처럼 아메리카노와 크로와상을 먹었다. 단, 크로와상을 7개 먹었다. 빵이 작았으니까. 걷다보니 양떼가 도로를 지나갔다. 양치기하는 사람이나 개도 보이지 않았는데 잘도 집에 찾아갔다. 산길을 오르니 뿔이 달려 있는 산양떼가 산턱에서 쉬고 있었다. 풀을 뜯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멀리서 일출이 시작했다. 서서히 차오르는 동그란 해가 아닌 구름 사이로 터져 뿜어져 나오는 햇살이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이런 일출을 목격할 수 있어서 뿌듯하다. 햇살을 뒤로 걷다보니 사람들 대화소리가 들렸다. 두 명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를 빠르게 지나쳤다.

- 부엔 까미노!

- 부엔 까미노!

언젠가 다시 길 위에서 만날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등산화 끈을 더 단단히 매었다. 크로와상도 든든하게 먹었고, 찬란한 햇살도 봤으니 나도 더 힘차게 걸어야겠다. 그 때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온 니콜 아주머니를 만났다. 나는 영어로 말할 수 있고, 스페인어는 단어만 몇 개 안다. 니콜 아주머니는 프랑스어로 말할 수 있고, 스페인어는 단어만 몇 개 안다. 이 때부터 이상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서로 아는 스페인어 단어를 던지고, 문법은 하늘에 맡기고, 문장은 각자 추측해야 했다.

- 결혼?

- 아니오. 결혼?

- 아니. 동거. 애 넷. 하나. 결혼. 

- 프랑스. 동거?

- 프랑스. 결혼. 불필요. 한국. 동거?

- 한국. 동거. 나빠. 결혼. 남자. 동거. 책임감. 노노?

- 상관 없어. 사랑. 존중. 결혼. 원해?

- 몰라요.

- 왜?

- 달라요. 나. 여행. 남자. 집. 

- 가치관. 라이프 스타일. 달라. 헤어짐. 길. 같음. 중요.

- 사랑. 평생. 몇 번?

- 옛날. 한 번. 지금. 여러 번.

서로 아는 스페인 단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고 손짓 발짓을 했다. 단어를 말해도 동사 변화를 모르니 했다는 건지, 할 것이라는건지, 하고 싶다는 건지, 해야 한다는 건지 맥락에 맞게 해석해야 했다. 몇 분만에 할 수 있을만한 대화를 몇 시간 동안 하니 속이 터질 것같았다. 프랑스어를 배워두는 것이었다. 이 역시 짧은 대화였지만 인상 깊게 남았다. 더 깊은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니콜 아주머니는 하루 걷는 거리가 20km정도라며 작은 마을이 있는 리엔도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이온음료, 영양제, 간식까지 챙기며 조급함 없이 자기 속도와 거리를 아는 니콜 아주머니가 멋있어 보였다. 나는 조금 더 큰 마을이 있는 라레도까지 걸을 수 있을 것같았다. 니콜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리엔도 마을을 지나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마을이 나왔는데 이어진 노란 화살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라는거지? 마지막 화살표 방향에 따르면 오른쪽 방향인데 한 집 앞에서 더 이상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도 왼쪽도 길이 보이지 않는 산이다. 대문을 두드렸다.

- 계세요! 세뇨르! 세뇨라! 도와주세요!

 집에 아무도 없는 건지, 있는데 나오지 않는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화살표 방향에 따라 오른쪽으로 길이 없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거기 아니에요! 

지나가는 순례자가 외쳤다. 약간 오른쪽으로 간 후 집 뒤에 난 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야 한다고 했다. 

- 감사합니다.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갈 뻔했어요.

- 하하하. 저도 길 잃었을 때 다른 순례자가 알려준 적 있어요. 서로 돕는 거죠 뭐. 

그 분은 자기 어깨까지 올라오는 큰 지팡이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나도 재빨리 뒤따랐다. 바다를 감상하며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마을이 보였다. 아마 라레도인 듯했다. 수많은 돌부리가 흩어져 있었는데 몇 개 위에는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귀여웠다. 마을은 보였지만 다시 화살표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길도 보이지 않았다. 

- (푸어억)

- 흐어억!

소똥인지 양똥인지 질퍽한 무엇을 밟았다. 그래도 계속 가야 했다. 그 분은 길이 나지 않았어도 라레도를 향해 쭉쭉 걸었다. 큰 지팡이를 들고 산길을 걷는 뒷모습이 진짜 순례자같았다. 수 천년이 지난 지금은 길도 났고 욕이 나올만큼 듬성듬성이더라도 노란색 화살표가 있지만 처음 순례한 사람들은 어떻게 걸었을까. 허허벌판에서 지금 저 분처럼 자신이 순례길을 만들어갔겠지. 길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둘은 고민하다가 철조망 너머 가방을 던지고 철조망을 약간 들어 밑으로 기어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철조망을 붙잡고 그 분이 먼저 건너고, 이어 그 분이 철조망을 잡고 내가 건넜다. 길을 벗어나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며 그 분이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바네사 아주머니는 벨기에 출신이었는데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았다.

- 일주일째라고 했지? 기분이 어때?

-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발이 너무 아파서 울었어요.

- 몸은 적응되면 괜찮아. 우는 것도 괜찮아. 나는 마음이 아파서 이미 여러 번 울었는데 뭐. 하하하.

- 마음은 왜요?

- 내가 한 달 넘게 까미노 걷는 동안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서 나를 떠날까봐.

- 한 달만에요? 하긴, 저도 친구들이 저를 잊고 대체할까봐 걱정하긴 했네요.

- 친구를 잃는 게 두려워?

- 네.

- 왜?

- 친구가 없으면 혼자가 되잖아요.

- 혼자인 걸 두려워하는 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데.

- 제 자신을 사랑하기에 부족한게 너무 많아서 사랑할 수 없어요.

- 뭐라고? 뭐가 더 필요한데?

- 제 자신을 사랑하려면 더 성공해야 하고, 더 예뻐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아요.

- 그게 누구 기준이야?

- 부모님 기준도 있고 제 기준도 있죠.

- 너는 세상에 하나뿐이야. 너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할 가치가 있어. 북쪽길 걸으면서 그 기준들로부터 자유로워져봐. 타인도 자유롭게 보내고 너 자신도 자유롭게 해방시켜봐!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기준을 넘을, 철조망처럼 넘을 힘을 얻고 싶었다. 그런데 바네사 아주머니는 기준 자체를 내려놓으라고 한다. 어떻게 자유로워지는거야? 어떻게 내려놓는 거야?

바네사 아주머니 얘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곧 알베르에 도착했다. 뭔가 특별해 보였다. 수녀원이었다. 하얀 옷을 입고 검은색 천으로 머리를 가린 수녀님들이 순례자 접수를 받고 있었다. 저녁 7시에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었고 8시에는 노래 시간이 있고 8시 반에는 저녁 식사가 있다고 했다. 저녁 식사가 8시 반이라니. 그래도 다른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미사와 노래, 식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일반 미사가 끝나자 순례자들을 성당 연단 앞으로 불렀다. 하얀 옷 위에 초록색 천을 걸친 신부님은 순례자에게 다가가 돌아가며 한 명씩 축복 기도를 해주셨다. 미사가 끝나고 자리를 옮기니 수녀님 세 분이 악보와 악기를 들고 계셨다. 수녀님은 돌아가며 이름, 출신지, 까미노를 하는 이유로 자기 소개를 돌아가며 하자고 했다. 10명 정도 있었는데 이미 만난 사람, 처음 보는 사람, 스쳐 지나간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있었다. 무엇보다 까미노를 하는 동기가 궁금했다. 

- 고민하는 일이 있는데 답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 은퇴 이후 삶을 구상하기 위해 왔습니다.

- 과거를 버리기 위해 왔습니다.

- 새 출발 하기 위해 왔습니다.

모두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까미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아저씨의 소개가 인상 깊었다.

- 제 이름은 마크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몰타에 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암에 걸렸어요. 그런데 수술을 받고 완치됐습니다. 저는 특별한 목적은 없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축하하기 위해 까미노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지 않고도 단지 살아있음을 매일 감사하고 축하한데. 와... 

남미에서 오신 수녀님은 노래하며 악기 연주를 몇 곡 하시더니 순례자 모두 함께 노래 부르자고 하셨다. 비틀즈의 Let It Be에 이어 여러 스페인 노래를 불렀다. 신나게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수녀님을 보면서 영화 Sound of Music 마리아처럼 수녀원을 탈출하고 싶지는 않을까 상상했다. 일반 알베르게와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자리를 옮겨 드디어 식사시간이 시작됐다.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나, 모두 다른 곳에서 살다가, 모두 다른 이유로 까미노를 시작한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한 자리에 모여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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