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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Sep 20.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산 로마노 24

- 니키야 라면 먹을래?

- 신부님 드실 거 아니예요?

- 두 개니까 너 하나 먹어도 돼.

신부님이라는 정체를 알고나서부터 내가 신부님 음식을 먹어도 되나 잠깐 멈칫했다. 신부님은 어제 저녁에도 음식을 주시더니 오늘 새벽에도 주셨다. 

- 라면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감사합니다. 여기서 아침 식사로 바게트를 자주 먹었는데 너무 딱딱하고 질기지 않아요? 

- 낯선 게 싫을 수도 있어. 근데 구워먹으면 맛있어.

- 그냥 먹어서 그렇구나. 다음부터는 구워먹어야겠어요.

밖은 아직 어슴푸레하다. 내가 걷는 흙길 옆에는 갈색과 초록색 잡초들이 더 자겠다고 뒤척인다. 더 먼 곳에는 진한 초록색 큰 나무들은 얌전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연푸른색 하늘 아래 보라색, 노란색 빛이 은은히 차오르고 있다. 해가 기지개를 펴나보다. 노란색이 더 강렬해지면서 붉을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찬란한 일출이다. 

일출을 감상하며 어제 신부님 말씀을 묵상했다. 예상치 못한 축복을 받은 것같다. 나도 신부님처럼 고통을 선물로 보고, 불안을 행복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 혜안은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닌가보다. 신부님은 10년 정도 직장인 생활을 하다가 성직자가 됐다고 한다. 금융 회사, IT 회사에서 돈도  적지 않게 벌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걸 자꾸 느꼈다고 했다. 성직자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냐고 물어봤다. 가져봤으니 버려도 미련도 없다고 했다. 가끔 속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데 친구들이 자신보다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가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면서, 나는 내가 마음이 열려있고 사고가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부님은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을 남한테 선택해달라고 떠넘기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신부님에 따르면 자신이 서양인, 동양인 다양하게 만나봤는데 동양인, 특히 한국인들이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같다고 했다. 선택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로 자꾸 해봐야 는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정답을 노골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강요받는다. 부모님이든, 친구든, 사회든, 이런 학교에 가야 하고, 저런 회사에 가야 하고, 이런 사람과 결혼해야 하고, 저런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야 한다는 관행을 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관행을 알게 모르게 따라간다. 무엇이 내 방향인가? 무엇이 내 속도인가? 남한테 물을 필요가 없다. 아니, 묻지 말아야 한다.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아야하는데 그 시행착오를 겪기 싫어서 사람들에게 부단히 물었었다. 앞으로 내 자신에게 질문하고, 선택하는 훈련을 해야겠다. 선택 근육을 키워야겠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바 앞에서 4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과 10대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을 만났다.

-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 우리는 폴란드에서 왔어. 나는 도로시고, 안나는 친구야. 이 아이는 베로니카인데 나랑 얘 엄마랑도 친구야. 베로니카 엄마는 심장이 아파서 이미 버스를 타고 갔어.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날거야. 

- 친구 딸과 까미노를 하시다니 대단하네요.

까미노는 가는 기간도, 루트도, 방법도, 관계도 정말 다양하다. 하나의 정해진 길도,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길도 없는 것같다.

바에서 와인을 시켰는데 카스테라도 함께 나왔다. 카스테라는 보들보들했다. 

- 우리는 근처에서 점심 먹을껀데, 너도 같이 갈래?

나는 더 걷다가 먹고 싶었다.

- 저는 먼저 가볼게요. 맛있게 드세요.

어제 신부님 축복의 효과일까. 대단한 선택은 아니지만 왠지 뿌듯했다. 작은 선택을 하는 연습을 반복하면 큰 선택도 점점 더 잘할 수 있을 것같았다.

루고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프리모티보길 출발지였던 오비에도 이후 일주일여만에 보는 도시다. 루고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로마 시대 성벽이 있다. 로마 시대에 루커스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벽이라고 한다. 3세기에 세워진 성벽이 어떻게 지금까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었을까. 루고 성벽 안에는 대성당, 쇼핑몰이 있었지만 나는 바나나 한 다발만 사들고 성벽 밖으로 바로 나왔다.

성벽을 나서는 다리 옆에는 조개껍데기, 노란화살표, 그리고 산티아고까지 남은 키로미터 수가 새겨진 돌기둥이 보인다. 97,272km! 스페인에서는 소수점 대신 콤마를 찍는데 남은 거리 100km를 돌파했다. 이룬에서 북쪽길을 시작할 때 돌기둥 숫자가 약 800km 이었는데 여기까지 왔다. 이 속도라면 내일 모레 산티아고 입성이 가능하다. 출발할 때는 묵시아, 피스테라 방문이 불확실했는데 이제 예정보다 오히려 일찍 도착해서 버스도 아니고 걸어서 두 곳을 방문할 수 있을 것같다. 고지가 보인다.

작열하는 스페인 태양이 이런 것이구나 맛 본 하루다. 이렇게 화창한 날 숲 속을 걸었으면 좋았겠지만, 하루종일 쉬어갈 나무도 찾기 힘든 아스팔트길이 계속됐다. 양우산을 챙겨왔다. 우산으로도 쓰기 귀찮아 거의 우비를 입었는데 오늘만큼은 양산으로 써야했다. 햇살이 뜨거웠다. 썬크림, 얼굴 반을 덮는 귀에 거는 티셔츠, 썬글라스, 모자까지 평소 4단 보호막을 했었는데, 오늘은 양산까지 씀으로써 5단 자외선 차단을 했다. 

햇빛으로 보면 아직도 한나절이지만 시간은 저녁이 다 되어 갔다. 이제 알베르게에 가야 한다.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작은 숲길이 나왔다. 어느 집 옆을 지나면서 닭을 봤다. 검정 닭, 갈색 닭, 회색 닭들이 푸드덕거리며 나를 앞질러 도망갔다. 다시 아스팔트길이 나오며 들판이 펼쳐졌다. 멀리 검은 소, 황색 소, 회색 소들이 내가 가든 말든 시큰둥하게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이제는 마을길에 들어섰다. 백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정말 가까이 있었다.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순백이 아니라서 그런지, 동화 속 백마만큼 멋있지 않았다. 내가 계속 걸어가니까 옆에서 따라 걸었다. 순한 아이였다.

계속 직진을 하려는데 누가 소리를 쳤다.

- 거기 아니에요! 오른쪽으로 가야 해요!

한 남성이 염소 30마리 정도를 삽살개 2마리와 몰고 있었다. 검은 염소, 갈색 염소, 흰 염소가 먼저 본 닭과 소들과 깔맞춤을 한 것 같았다.

- 어디서 왔어요? 중국? 일본?

- 한국에서 왔어요.

- 가끔 한국 사람도 와요. 부엔 까미노!

- 감사합니다!

배배거리는 염소들을 피해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 여기도 염소 무리와 떨어진 염소 몇 마리가 있었다. 아저씨한테 알려줘야하나 생각했는데 곧이어 삽살개가 뛰어왔다. 삽살개가 몇 번 짖으며 밖으로 반원을 그리자 일탈한 염소들은 다시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배배거리며 뛰어갔다.

폭신판 풀길이라 나도 기분이 좋아졌는데 뒤에서 염소 소리가 들렸다. 배애애. 하얀 염소 한 마리가 나를 따라왔다.

- 너 나 따라오면 안돼. 저리 가!

삽살개가 오겠지 생각했는데 오지 않았다. 더 길을 따라 갔다. 염소가 계속 따라왔다. 사람이 찾으러 오겠지 생각했는데 오지 않았다.

- 이 길은 너가 갈 길이 아니야. 내가 간다고 너도 따라오면 안돼. 너 갈 길을 가라고!

배애애. 알았다는건지 대답은 잘했다. 나를 따라오다가 멈추고, 따라오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뭔가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고, 저 사람을 따라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구를 따라가야할지는 모르겠고, 혼란스러워하는 것같았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너가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어. 남을 따라가지 말고 너가 네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해. 

내가 염소한테 말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말 잘 듣는 염소가 귀여우면서 안타까웠다. 무리를 잘 찾았을까? 무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았을까? 너도 행복하길 바래. 너의 앞날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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