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by 카멜레온

수호 천사는 아이가 태어나 눈을 뜨는 순간 아이와 시선을 처음 마주친다. 천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 연민을 느낀다. 천사는 인간이 겪을 사건들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삶에 흥미를 느끼지도,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단지 인간이 스스로 배우고, 명분을 갖다붙이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새로울 것 없는 인간의 삶은 천사들의 입장에서는 사건의 되풀이일 뿐이다. 보호받고 싶은 인간 욕구가 발현된 것일까.


물론 신도 있다. 나약한 인간이지만 원하는 것이 많아서 희망을 갖고 싶어서 만들어버린 신이다. 기도하러 오는 신자들은 남성, 여성, 아이, 노인 다양하다. 신은 아픈 이와 약한 이를 돕기 위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인간을 치유하고 힘을 준다. 어떤 이는 힘을 받아 건강을 회복하고 능력을 키운다. 이들은 다시 신의 모형물이나 장신구를 갖추고 다음에 또 기도한다. 반면 어떤 이에게는 밑 빠진 독처럼 신이 부여한 힘이 빠져나간다. 이런 이들은 기적을 바랐지만 이내 신앙을 잃는다.


익사자는 물까마귀라고 불리던 소작농이 저수지에 빠진 영혼이다. 영혼계에도 인간계에도 입성하지 못한 채 연기 혹은 안개처럼 저수지와 숲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았다. 세계2차대전 때 익사자는 숲에서 군인들의 시체에서 영혼이 풀려나는 것을 보았다. 투명한 풍선처럼 약하게 꿈틀거리는 영혼이 수백, 수천이었다. 영혼들은 끈 놓친 풍선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숲은 영혼들 때문에 잠시 하얗게 변했다가 일순간에 텅 비었다.


과수원에서는 해마다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두 개의 시간 - 사과나무의 시간 그리고 배나무의 시간이 있다. 사과나무의 시간이 되면 아이디어가 샘솟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묘목을 심고, 새 집을 짓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배신하고, 여행길에 오르고, 새로운 목표와 이상을 주창하는 정부가 들어선다. 배나무의 시간이 되면 새로운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기존의 것들이 지속하고, 뿌리는 튼튼해지고, 동물과 인간의 몸에 지방이 쌓이고, 은행은 이익을 내고, 창고에는 제품이 쌓이고, 정부는 견고해진다.


동물들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랄카는 덥수룩한 붉은 털을 가진 암캐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고통에 끌려다니지만, 랄카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다. 단지 이 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인간은 시간의 포로이기에 의미를 찾아 헤매지만 랄카에게는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는 현실을 감지할 뿐이다. 감정을 느끼는 건 인간이나 랄카나 마찬가지이지만 동물의 감정이 더 순수하다. 그 어떤 생각도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도 동물도 아닌 버셧균은 태양으로부터 아무런 힘을 흡수하지 못한다. 땅 속에 썩거나 죽은 것들의 즙을 빨아 마시는 죽음의 생명체이다. 버섯균은 아이들을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버섯에게 생장 에너지와 홀씨를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어떤 버섯에게는 향기를,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태를 허락해준다. 루타는 인간의 시간으로 치면 80년에 한 번씩 박동하는 버섯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버섯균은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도록 만든다. 이런 식으로 버섯균은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했다.


나무와 도자기, 놋쇠로 이루어진 그라인더는 커피콩을 가는 도구이다. 미하우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라인더를 배낭 속에 숨겼다. 밤마다 병영에서 몰래 그라인더의 서랍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거기에는 안전함, 커피, 집의 향기가 났다. 수십 년 후 미하우의 딸 미시아는 집 앞 벤치로 그라인더를 들고 나와 손잡이를 돌렸다. 세상 전체가 막 갈아낸 커피 향기 속에서 융합됐다. 수십 년 후 미하우의 손녀이자 미시아의 딸 아델카는 집으로부터 떠나는 버스에 올라타 가방을 열어 그라인더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라인더는 갈아낸다는 관념을 인간이 물질로 형상화한 조각이다.


그리고 인간이 있다. 삼대에 걸쳐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 냉전과 사회주의를 겪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인간은 결국 상상과 영혼, 동물, 식물, 균, 물질로 이루어진 이 광활한 우주에서 잠시 생겼다가 곧 사라지는 찰나의 먼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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