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성실이 죄는 아니잖아
‘내가 92점이라고??!!!’
200x 년 어느 날
고1 어느 기말고사 날, 분명히 아는 문제를 틀렸다.
원래는 96점이었어야 했는데 4점짜리 한 문제를 마킹 실수로 92점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집에 와서 엉엉 30분을 울었다.
100점도 아닌데 나의 실수에 대해서는 점수가 깎이는 게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도 울 땐 몰랐지만 그 이후 나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국영수처럼 중요 과목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과목에서 그것도 한 문제 틀린 걸 가지고 그 정도로 울 일인가?’라고 머리로는 생각을 했지만 내 마음의 중심은 내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부모님은 오히려 나를 풀어주는 스타일이었는데 나는 부모님과는 달리 나의 창살을 스스로 만들고 채찍질해가면서 공부했었다. 이렇게 하면 ‘언젠가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이 되지 않을까?’ 상상했다. 이동시간에 걸려온 전화에도 영어로 솰라솰라 일을 처리하고, 핏이 딱 떨어지는 정장에 당당한 모습을 걸어가는 커리어우먼 말이다.
분명 나의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커리어우먼이 된 미래에서는 뭔가 완벽할 것 같다고 꿈꿨다. 막연하게 그냥 좋을 것만 같았다.
2021년.
어느새 30대가 되었고, 직장에도 다닌다. 여러 해의 직장생활을 거치며 어째 어째 영어는 쉬운 말만 할 수 있고(그마저도 쓸 일은 거의 없다), 찐 프로의 냄새가 풍기는 티셔츠와 배기팬츠(꽉 끼는 불편함 따위는 거부하는 회사용 작업복이다)를 입고, 점심을 적당히 때울 샐러드 봉투를 들고 회색빛으로 가득한 테헤란로를 걸어 다니는 커리어 있는지 모르겠는 그냥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큰 물에서 놀고 싶었다. 매일 세계지도가 깔린 식탁에서 식사하며 엄마와 ‘이런 나라가 있네. 이런 데에 가보고 싶다. 전 세계를 다니고 싶다’라고 대화하며 자랐다. 그때부터인가 해외의 다국적 기업 어딘가에서 역량을 펼치고 외국인들과 일하기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만원인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하루하루 피곤에 찌들어 있을 뿐이다. 연봉 1800만 원에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직장을 시작으로 8년이 지나서는 비교적 연봉도 조금 높아지고 퇴근도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내 기준은 항상 저 멀리에 있었고, 나의 삶은 그곳과 거리가 멀었다.
‘내 실력이 더 나아지면…’, ‘직무를 바꾸면…’, ‘직장을 바꾸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 등의 가정을 하면서 온갖 강연과 커뮤니티 모임에 참여하며 열심히 했다. 그럼에도 내가 행복해질 만한 답은 찾기가 어려웠고, 삶이 내 기준에 이르지 않자 내 마음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깊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도착해서 슬랙을 한참 하다가도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변비도 아닌데 이유 없이 화장실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업무 자리에서 창 밖만 바라봐도 눈물이 흘렀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기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알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는 게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 오로지 원하는 것은 좋은 커리어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완벽을 추구하는 내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직장생활에서 4번의 이직, 셀 수 없는 전직, 그리고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통해 나를 찾던 경험 그리고 내가 편하게 숨 쉬고 행복을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다.
오늘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길 원하는 분들이 이 글들을 보고 행복의 실마리를 찾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