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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cobalt Oct 22. 2023

삼 남매의 집은 어디인가

지금 이 시대에, 삼 남매를 키우고 있다.


정부는 신도시를 만들어 아파트를 세우고, 신혼부부에게 가점을 부여한다. 그러나, 아이들 키우기에 아파트가 최선일까?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누구든 층간 소음의 가해자가 되고, 아이들은 시끄럽다는 이유로 집 안뿐만 아니라 놀이터에서 뛰는 것도 제한되기도 한다. 효율성으로만 따진다면 아파트는 최적의 선택지이다. 좁은 면적에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고 관리가 수월하다. 하지만 효율성이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거기다 '순살 아파트'라면 더더욱. 삼 남매를 키우는 나에게 아파트는 나에게 갈 수도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출산율 대책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를 줄임말인 "문송합니다"는 말처럼,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죄송합니다"는 어느새 나에게 배어 버린 태도를, 정부는 알리가 없을 것 같다. 신도시를 세워 아파트 짓기 급급한 걸 보면 말이다.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좋은, 마을 다운 마을. 아이들의 추억의 배경이 될만한 마을에서 살만한 인프라. 그래서 모두의 삶이 나아지는 사회. 옆집 할머니와 마주쳐도 환하게 인사할 수 있는 사람 살만한 공간과 그런 삶의 방식을 모두가 선호하는 사회로 전환되지 않는 다면 주택 공급이 결혼까지는 이어질지 몰라도, 유의미한 출산율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적이고 순진한 바람일지 모르지만, 정말로 이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저출산이라면, 일괄적인 아파트 공급만이 아닌 공간의 질적 문제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나의 공간의 안락함을 우당탕탕 소리로 침범하는 아이들은 더 이상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내 영역의 보이지 않는 침범자’ 일뿐이다. 이웃에게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와 환한 미소를 귀하게 나눠 가질 수 있게 되려면 건축 비용을 줄이기 위한 얇디얇은 철근과 바닥, 벽의 두께가 아니라 이웃과의 더 두꺼운 울타리, 삶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마당 있는 다세대 주택에 이사 온 것은 집은 낡았지만 마당도 있는 데다, 우리가 살 넓은 평수의 2층 밑의 작은 평수의 1층 두 개의 집이 모두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사는 사람은 없었던 주택에 들어와 마당을 정비하고 고치면서 정원 가득 자란 봄을 모두의 마음에 품었다. 1층에 이웃들이 들어왔고 그때부터 이웃과 마주치면 그냥 죄송스럽고 감사하고, 그렇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지칠 때까지 놀이터나 공원에 있다 들어오고 시공매트는 물론이다. 그럼에도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나의 삶 자체가 누군가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뉴스피드를 보듯, 우리 동네 부동산을 검색한다. 삼 남매의 집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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