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cobalt Aug 25. 2023

여름휴가, 책으로 도피했습니다


"여름휴가, 어디로 가세요?"

8월 한 달간, 아마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일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과 자본이 투여돼야 하는 일이라 고민의 고민만 거듭하다 결국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새로울 것이 없어져 버린 제주도와, 발 디딜 틈이 없는 바닷가에서도, 안 그래도 더운데 더 더운 동남아에서도 남들은 잘 놀다 온 것 같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뿐인 우리 가족의 소중한 휴가는 날씨도, 공간도, 그 모든 것이 완벽했으면 하는 바라는 욕심에서, 검색의 검색을 거듭하다 결국은 선택하기를 포기했다.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책으로 도피해서 정신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여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운문학도서관과 정독도서관.

올 여름에는 집과 가까운 정독 도서관, 청운 문학도서관, 남산도서관을 순회했다. 왜 지금껏 도서관에 올 생각을 여태껏 못했을까, 생각될 정도로 도서관만이 줄 수 있는 조용함, 평온함 그리고 여유로움이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가며 잊고 지냈던 독서의 즐거움을 이번 여름이 되어서야 되찾았고, 60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정신적으로 굶주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세차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듣고 내리쬐는 햇살에 여름을 느끼고, 도서관의 가장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도서관의 고요함 속에서 나의 마음과 정신을 도닥일 수 있었다. 시끄럽고 해야 할 집안일로 가득 한 나의 일상과, 해야 할 일과 선택해야 하는 고민들로 어지러운 나의 정신에서 도피하는, 진정한 마음의 휴양지였다.


다른 사람의 책 추천도, 읽어야 하는 의무도 없이 고른 60권의 책들은 주로 글쓰기에 관한 책, 미술 책, 조금의 경제서, 에세이들이었다. 그 속에서 누구보다 투명하고 진솔한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꿈,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인 사람들의 진솔한 조언을 들었다. 그사이 관심 있는 작가도 생겨, 그 사람이 쓴 책을 파고들며 더 친해지려,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노력하기도 했다.


책과 글,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훌륭한 글을 쓴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정신적 공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마치 공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 있는가 하면, 빨리 나가고 싶은 공간도 있다. 대부분의 엄선된 작가들이 보여주는 공간은 깊이도 남다르고 취향도 뚜렷해서 그저 바라보다가, 이런 문양은 어떻게 만들었지 고민하며 바라보게 만드는 건축물 같기도 했다. 문장은 다 읽었는데, 이미 내용도 알고 있는데 나가기가 아쉬워 계속 머무르게 되는, 여행지에서 마주친 고요한 성당 같은 글도 있다.


또한 이름 모를 출판사에서 나온 작가의 초기작에 반해 조금은 어둡고 후미진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최근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작가의 최신작에서 만개한 듯 웃고 있는  작가 프로필 사진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글쓰기에 관한 책들은 나에게 특히나 도움이 되었는데, 글쓰기에 대한 조언은 어느 작가나, 한결같은 점이 있었다. 핵심적인 것은 잘 쓰나, 못쓰나 상관없이 글쓰기 자체를 습관처럼 하라는 것이었다. 앉아서 노트북을 펼치는 일이 안 하고는 배길 수 없는 하나의 습관이 되도록 말이다. '영감'은 나의 의지대로 불러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나는 나의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글이 공통된 주제로 엮이고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독자도 안다. 자신이 읽는 글이 작가가 억지로 끌어내 쓴 글인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응축된 글인지. 주제와 걸맞지 않게 후반부가 옆길로 새고 억지로 가져다 붙여 힘이 너무 들어간 글은 마감에 쫓겨 억지로 완성한 책인 경우도 있다. 혹은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를 했는지 주제에 대한 의욕도 없고 '그래 내가 써 준다"는 마음으로 쓰인 것 같은 유명교수의 허접한 책도 있었다. 브런치나 블로그도 마찬가지. 다작하는 어느 작가의 블로그는 1일 5 포스팅이 되기도 했는데, 정말 '글쓰기를 위한 글쓰기' 같은 느낌이라 헐겁게 건축된 건물에서 빨리 나오고 싶은 위급함을 느끼기도 했다. 매일 쓰되, 발행하는 글은 귀한 글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들어내는 작은 세계는 그렇게 소중하고, 정돈되고 안락해서 사는 이의 정갈함이 묻어나는 그런 공간이었으면 한다.

너무 더웠던 여름, 안락하고 정돈된 그리고 섬세한 집주인의 손길이 묻어나는 공간으로 이끌어준 작가들(에이드리언 리치, 소피 카르캥, 요한 하리, 고수리, 하재영, 이은경, 유영만, 김영민, 시어도어 젤딘, 마거릿 애트우드, 낸시 콜리어, 레이철 시먼스, 이소영)에게 고마운 여름이었다. 그 덕에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는데도 특별한 많은 장소에 초대받아 다녀온 것 같다.



이전 02화 평창동 신혼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