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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Oct 26. 2020

동행(同行) - 한라산에서

빨리 가려면 홀로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지난 7월 중순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아내와 함께였습니다. 코로나 19 확산세가 다소 진정된 틈을 타 1박 2일 일정으로 한라산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시국이 시국인지라 한라산행이 크게 내키지 않았습니다. 한라산이 처음도 아니었고요. 벌써 네 차례나 올랐습니다. 작년 봄 산행을 포함해 두 번은 아내와 함께 한 산행이었습니다.

2020년 7월 아내와 함께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습니다.

  제주공항에 내리니 장마철이었음에도 날씨가 좋았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날이 궂을 경우 한라산 입산이 통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라산은 둘째 날 오르기로 했습니다. 첫날은 숙소에서 가까운 해안가를 산책했습니다. 비양도가 건너다 보이는 금릉 해변이었습니다.

  해안을 걷는 동안 인상적이었던 건 희디 흰 백사장과 이국적인 야자수가 아니었습니다. 예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여행객들이었습니다. 작년 봄 찾았을 때는 주말도 아니고 비까지 내렸는데도 백사장에 여행객들이 북적북적했었는데, 올해는 해안이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코로나 19 여파 때문이었겠지요.

코로나 19 여파로 피서객들이 찾지 않아 금릉 해변이 썰렁했습니다.

  시절이 수상한 가운데서도 한라산에 오르기로 한 것은 인증 샷을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작년 봄 한라산을 다녀온 직후 아내는 친구의 권유로 무슨 100대 명산 인증 프로그램인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심드렁하더니 인증 샷이 늘어날수록 적극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별로 내켜하지 않는 저까지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지독한 길치였습니다. 평소에 혼자서 차를 몰고 나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길을 잃을까 봐. 반면 저는 길눈이 밝은 편입니다. 없는 길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조금 과장이겠지만, 아무튼 산에서고 낯선 도시에서고 심지어 외국에서도 저는 여간해선 길을 잃지 않습니다. 아내는 길눈 밝은 저를 산행 길잡이로 삼기 위해 애교와 간청, 심지어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승복했습니다. 아내에겐 다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판악에서 속밭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산책로처럼 편합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성판악으로 향했습니다. 산행에 앞서 매점에서 김밥과 식수를 구입했습니다. 예전에는 진달래밭 대피소 매점에서 생수며 컵라면 등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2018년 매점을 폐쇄한 후 무인 대피소로 운영 중이라 개인이 알아서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성판악에서 속밭 대피소까지 약 4km 구간은 천천히 걸어도 1시간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오르막도 거의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라오름 입구까지 1.7km 구간도 중간에 오르막이 있긴 하지만 크게 어렵진 않습니다.

  하지만 걸음이 느린 아내로 인해 속도가 나질 않았습니다. 예약해둔 항공편이 오후 6시 출발이라 다소 여유가 있긴 했지만 마냥 시간을 허비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라오름에 들렀다 가는 건 포기하고 바로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2018년 매점을 폐쇄한 진달래밭 대피소는 무인 대피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름 부지런히 걸었음에도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하니 벌써 11시였습니다. 이곳의 하절기 입산제한시간이 오후 1시라 아직 여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뒤로 처지는 아내를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힘든 코스가 시작되는데, 이러다 늦는 건 아닌가.

  2013년인가 처음 한라산을 찾았을 때는 이곳에서 발목이 잡혀 정상에 오르지 못했었습니다. 동절기였기 때문에 12시 전에 통제소를 통과해야 했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천과 제주를 왕복하는 여객선이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제주항에 도착한 까닭이었습니다. 이듬해 4월 최악의 참사를 빚고,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침몰한 그 배는 당시에도 문제가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등산로 주변 고사목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주변에 제법 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태풍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아무튼 앙상하게 형해만 남은 고사목은 원혼이라도 깃든 양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뒤 따라오는 아내를 기다렸다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였습니다.

  "한라산은 1,947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2,750m인 백두산인데, 그렇다면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일까?"

  하지만 아내는 대답 없이 거친 숨만 연실 내쉬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대답할 기운도, 대답을 들을 힘도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순간 머쓱해지는 분위기라니.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긴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썰렁한 질문이라니. 저라도 그냥 지나쳤을 것 같네요.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등산객들이 정상석을 향해 길게 줄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니 바람이 찼습니다. 순간 정상석 앞에 늘어선 등산객들 뒤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습니다. 정상석에 비해 인기가 덜한 정상목 쪽 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인증 샷인데, 두 군데 모두 인증이 가능했습니다. 사진을 찍은 후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바람도 찼지만 허기로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자주 쉬었던 아내 덕분에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쉬고 있는 등산객들을 바라보고 있네요.

  하산하다가 서귀포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한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김밥은 두 개를 포일 하나로 감싼 형태였습니다. 한 줄 3,000원이 비싸다 싶었는데, 양이며 맛이며 이 정도면 가성비가 높은 편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김밥이 굳은 건 다소 아쉬웠지만. 그런 김밥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아내가 툭하고 말을 던졌습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느려서. 그래서 당신 짜증 많이 났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물론 거짓말이었겠죠. 하지만 어쩔 것입니까? 함께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부부란 어차피 동행이 아니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아프리카 속담이라 하던가요? 아무튼 저는 아내의 질문에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객쩍은 농담으로 답을 했습니다.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지만 한반도 전체로 보면 10위 권에도 들지 못합니다.

  “짜증은 무슨, 시간도 많은데. 참 남한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이 백두산 다음으로 높은 줄 알지만 아니라고 하데. 함경북도에 있는 관모봉이 해발 2,541m로 두 번째 높은 산이래. 결정적인 건 개마고원 일대에 높은 산들이 많아 한라산은 1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는 거야. 빨리 통일돼서 개마고원이나 갔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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