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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Jun 08. 2018

휴가 낸 여행자에겐 실패할 여유가 없다.

가장 유명한 내 단골집

안녕, 여러분. 에디터H다. 오늘은 포르투에서 머물고 있는 우리 동네 자랑 좀 해볼까 한다. 서울에선 동네를 수식하는 최고의 단어가 있다. 바로 ‘역세권’. 집에서 지하철까지의 거리가 짧을 수록 그 가치를 후하게 쳐준다. 언제나 일터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인생이니까.


[축구 경기만 없으면 언제나 조용한 우리 동네]

포르투에서의 삶은 역세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방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출근 완료. 거실이 나의 사무실인걸. 덕분에 우리의 행동 반경은 아주 비좁아졌다. 나와 에디터M은 원래 여행지에 대한 개척 정신(?)이 희박한 편이다. 좋게 말하면 느긋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게으르다. ‘어디는 유명한 곳이니 꼭 가봐야한다더라’하는 압박은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저 편한 옷을 챙겨입고 집 근처 마트에서 과일과 와인을 사고, 동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는 삶을 사랑한다.


[이 동네 최고 힙스터]

다행스러운건 조용하고 소박해 보였던 우리 동네가 의외의 ‘힙세권’이었다는 것이다. 힙세권이 뭐냐고? 지금 내가 만든 말이니 되물으시는 게 당연하다. 도처에 HIP한 감성이 넘쳐난다는 얘기다. 투박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멋진 곳이 잔뜩 숨어있다. 포르투의 성수동이랄까? 한 달을 살며 발견한 우리 동네 힙 플레이스를 모아봤다. 아마 여행으로 왔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그런 곳들. 혹시 포르투에 오신다면 꼭 들려보시길. 조용한 동네지만 번화가에서 멀지 않다.


1. The happy Nest
Av. de Rodrigues de Freitas 293, 4000-421 Porto



망설임 없이 1번으로 소개하는 곳. 내가 포르투에서 우리 이층집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장소다. 우리가 막 포르투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오픈 준비중이었다. 뒤늦게 오픈했길래 혼자 가서 글이나 쓰고 올 마음으로 들렀다. 워낙 좁은 공간이라 별 기대도 없었다.


[처음엔 이 공간이 전부인줄 알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6인용 나무 테이블 하나 덜렁 서있는 아주 작은 카페다. 멋진 두 여자가 나를 반겼다. 테이블 한쪽 끝에 앉으려는데 “안 쪽에 가든이 있는데 거기가 더 좋다”고 말해준다.



포르투는 폭이 좁고 기다란 형태의 건물이 많다. 여기도 그랬다. 가든이 있다고? 심드렁하게 들어갔다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 완벽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사진에선 아마 다 표현되지 않겠지]

깊숙이 들어가니 밖에선 상상도 못한 공간이 펼쳐진다. 비밀스럽게 숨어있던 뒷뜰의 가든은 완벽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살갗에 닿으면 바사삭 부서졌다. 파라솔 밑에 앉으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담장 위로 보이는 굴뚝 마저 그림 같았다]

햇빛이 간지럽게 들어오는 발가락 끝이 따뜻했다. 여기가 천국이라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글을 썼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찾아갔다.



이 브런치 카페를 운영하는 두 여자는 놀라울 만큼 프랑스어와 영어가 유창하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서로 달라서 더 쿨했는데, 나와 에디터M도 저렇게 보였으면 싶더라. 메뉴는 간단한 음료와 브런치를 판다. 샌드위치도 맛있고 샐러드도 괜찮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포르투의 숨은 힙스터들이 가든에 모여 앉아 샐러드를 먹고 있다. 만약 서울에서 찾은 가게였으면 절대 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만 알고 싶으니까. 가든에 앉아있으면 자꾸만 시간이 아쉬워진다. 때로는 영원히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2. Duas De Letra
Passeio de São Lázaro 48, 4000-175 Porto



앞서 소개한 <The happy Nest>의 발견 이후 적극적으로 동네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매일 무심히 지나치던 공원 옆 카페에서 힙스터 향기가 뿜어져 나오더라. 정말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들어갔다. 입구가 어둡고 좁아서 내부가 넓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들어가보니 2층까지 사용하는 넓은 공간이었다. 1층 안쪽엔 아담한 테라스가 숨겨져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너무 좋아서 방방 뛰었다.


[10유로만 들고 가면 디저트까지 잔뜩 시킬 수 있다]

친절하고 핸섬한 사장님이 영어 메뉴판을 건넨다. ‘Port with tonic’이란 낯선 메뉴가 보이길래 냉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위는 더 좋았다.


[일종의 전시 공간같기도 했다]

벽에는 독특한 그림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소품 하나 하나까지 유니크했다. 안쪽엔 해가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투명한 지붕 위로 고양이가 뛰어다니고, 수십 개의 화분이 놓인 묘한 공간이었다. 나는 또 홀딱 반해버렸다.



내가 주문한 음료는 포트 와인으로 만든 칵테일이었다. 달콤하고 청량했다. 뭐든 1유로면 마실 수 있는 이 동네 물가에 비하면 상당히 비싼 5유로짜리 술이었지만, 갈 때마다 그걸 마셨다.



동네 카페는 6시면 문을 닫아버리는데 여긴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어서 10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이상할 만큼 노트북을 들고 방문한 손님의 비중이 높았다. 포르투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손님의 대부분이 카페에서 맥북으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근처에 있는 아트 스쿨 학생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노트북을 들고 방문하는 게 머쓱하지 않았다. 투박한 외관의 이 동네 가게들이 모두 이렇게 멋진 공간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모두가 비밀의 화원 같았다.


3. Dona Gertrudes
Passeio de São Lázaro 44, 4000-434 Porto



여긴 방금 소개한 <Duas De Letra> 카페의 바로 옆집이다. 점심 영업은 하지 않고 저녁 영업만 하더라. 밥 먹으러 멀리 나가기 싫은 날 무심코 들렀다.



레스토랑 안은 아주 어두웠고, 테이블마다 희미한 불빛의 전등이나 작은 초가 놓여있었다.



벽에는 기괴할 만큼 많은 액자와 접시, 시계 따위가 걸려있었다. 액자 속엔 아주 오래된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일부러 모은 소품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 하나 늘어난 것들이었다. 분명히.



우리 테이블을 담당한 아저씨는 수완이 좋았다. 중후한 목소리로 메뉴를 추천하고, 와인을 설명해줬는데 그 순간이 아주 즐거웠다. 노련한 접대와 울림있는 목소리 덕분에 마치 뮤지컬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혹은 파두(fado) 일지도. 음식도 맛있었지만 추천받은 와인이 끝내줬다. 나 혼자 반 병쯤 마신 것 같다. 포르투에서 가장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알딸딸한 상태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는데, 코멘트를 이렇게 써놨더라.


[음식도 좋았다, 디저트로 푸딩까지 해치웠다]

“모든 게 너무 완벽하면 겁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그 완벽한 디너를 한 번 더 즐기고 싶었는데, 슬프게도 그 뒤로 계속 문을 열지 않는다. 어떤 순간들은 고대할 수록 손에 잡히지 않더라.


4.TerraPlana
Av. de Rodrigues de Freitas 287, 4000-421 Porto



유럽의 도시가 다 그렇듯, 우리 동네도 모든 가게가 일찍 문을 닫는다. 새벽녘에도 불 밝힌 곳이 널린 서울의 밤을 생각한다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집 근처에 붉은색 나무문의 칵테일바가 있는데, 지나가다 흘끗 보니 금요일과 토요일엔 새벽 3시까지 문을 열더라. 이 인적 드문 골목에서 별난 일이다 싶어 한 번 가봐야지 싶었다. 매일 저녁 식사마다 술을 거하게 마시는 통에 좀처럼 2차를 갈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붉은문을 열었다.



아아, 이 동네는 어째서 매번 반전의 연속인걸까? 동네 아저씨들이 맥주를 홀짝이는 후줄근한 풍경을 생각했는데, 여기는 흡사 청담동.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게다가 손님이 버글거린다. 동네 사람들! 다들 밤마다 여기 와서 놀고 있었던거야?



바텐더의 간지도 심상치 않다. 근사한 2층 쇼파 좌석과 야외로 통하는 계단을 발견하고 나서는 이 동네의 놀라운 힙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말쑥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커플이 있는가 하면, 중년 신사가 한참 어린 청년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피자를 먹으며 깔깔대는 예쁜 언니(동생이겠지만)들도 보였다. 온갖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분주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그렇게 마음에 들더라. 이곳의 안주는 대화였다. 우린 옥상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주문했다.



온갖 기교를 부린 내 칵테일은 트럼프 카드와 함께 서빙됐다. 타란티노 감독의 이름을 딴 칵테일은 영화 펄프 픽션의 비디오 테이프 위에 서빙됐고 말이다. 칵테일 한 잔에도 취향과 위트가 넘쳐났다. 남녀 화장실을 투명한 셀로판지로 구분해놓은 걸 보고 식겁하긴 했지만, 정말 근사한 바였다. 고요한 우리 이층집 옆에 이런 바가 있었다니, 포르투는 문만 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당연히 우린 단골이 됐다.


5. Tendinha Dos Poveiros
da, Largo Ramadinha 67, 4000-222 Porto



여긴 좀 독특한 곳이다. 앞서 소개한 가게들처럼 멋진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코딱지만한 가게 앞에 레드복이 새겨진(포르투갈 국민 맥주 브랜드) 조악한 플라스틱 테이블을 잔뜩 깔아놓은 게 전부다. 여길 갔을 때도 우리에겐 아무 기대가 없었다. 전날 밤에 거친 마감을 하나 끝낸 상태였고, 축하 삼아 거한 점심을 먹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 사무실로 돌아가기 아쉬워져서 파라솔이 있는 아무 야외 테이블에서나 쉬어가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러다 얻어걸린 게 여기. 자리를 잡고 보니 카페라기 보다는 바에 가깝다. 가게가 워낙 허름해서 주문하러 들어가면서도 약간 무서웠다.



포르투갈은 아무리 작은 카페라도 직접 짠 오렌지 주스를 파는데, 여긴 술 외에는 캔에 든 탄산음료 밖에 없었다. 다들 허접한 정체불명의 소다 음료를 주문했다. 하지만 해외 생활의 미덕이 낮술이라고 믿는 나는 재빨리 메뉴를 스캔하고 화이트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세상에 샹그리아가 한 잔에 1유로! 더 신기한 것은 생맥주를 따르듯 디스펜서 호스를 꾹 당겨 바로 뽑아주는(?) 시스템이었던 것. 샹그리아가 호스에서 나오다니!



종이컵보다 더 얇은 싸구려 플라스틱 잔에 담긴 샹그리아엔 라즈베리 한 두조각이 둥둥 떠있을 뿐, 내용물도 없었다. 포르투갈의 다른 곳에서 샹그리아를 시키면 사과와 허브를 화분처럼 가득 담아주는데 여긴 어찌나 시크하던지. 잔을 툭 내미는 허스키한 보이스의 여주인 역시 놀라울 만큼 시크하고 멋있다.



이날 마신건 포르투 최고의 샹그리아였다. 다들 내 걸 한 모금씩 뺏어 마시더니, 하나씩 더 주문했을 정도로. 그러고 나서 보니 가게 앞에 사람이 참 많았다. 어쩐지 엉덩이가 여기 착 붙는 편안함이 있었다. 그 뒤로 종종 낮술을 즐기러 들렀다.


[밤에 오면 이런 분위기, 새벽이 되면 사람이 더 많아진다]

여기가 이 동네 최고의 ‘만남의 장소’였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저녁을 먹고 자정 무렵에 들어오는데, 불꺼진 골목에 여기만 사람이 바글바글 끓고 있더라. 평일에도 무려 새벽 4시까지 영업을 하는 핫플레이스였다. 다들 여기서 맥주 한 병을 들고 새로운 만남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싯적에 자주 가던 이태원 바가 떠올랐다. 허름하고, 별 거 없지만 이상하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 후후. 다들 좋은 인연 되시길.



벼르고 벼르던 우리 동네 자랑글을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좋아하는 곳이 많아서 다섯 장소만 추리느라 마음 고생 좀 했다. 하나 같이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하지만 만약 일주일 남짓 머무르는 여행자의 입장이었다면,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유명하거나 대단한 곳은 아니니까.



여행가면 어디가 맛집인지 검색해보지 말고, 발길 닿는 대로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제대로 여행을 만끽하려면 그런 델 가면 안된다면서. 글쎄, 나는 이런 충고도 일종의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계획 없이 쏘다니는 자유로움이 잘 맞을 지 모른다. 좋으면 좋은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대로. 그러나 직장에 휴가를 내고 빠듯한 일정으로 떠나온 여행자에겐 실패할 여유가 없다. 가장 유명하고 맛있다는 집에 줄을 서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맛보고, 분위기를 즐기는 게 뭐가 바보 같은가.



우리에겐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이 있고, 매일 똑같은 길을 걸어다니며 호기심을 품을 기회가 있었다. 오늘 갔던 가게가 별로였다면 내일은 다른 곳에 가보면 된다. 조바심이 없다. 새삼 깨닫는다. 낯선 도시의 골목길에 익숙해지고 분위기를 익혀가는 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경험인가. 매일 드나드는 카페가 생기고, 인사를 주고 받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녹아드는 기분이 든다. 한 달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다시 없을 시간이라는 생각을 매일 한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연장하려고 했지만 비싸서 포기했다. 남은 것들을 즐기는 수밖에.


에디터H의 단골집 리스트는 여기까지. 조만간 포르투의 맛집 리스트도 모아보려고 한다. 형편없는 게으름뱅이지만 가끔은 집앞을 좀 벗어나봐야겠다.




세 여자들의 포르투 한 달 살이가 궁금하시다면,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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