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축복인가, 집착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이런 우리 삶의 구조를 기묘하게 비추어 줍니다.
그 상자가 열렸을 때 인간이 알지 못했던 불행들, 병, 시기, 죽음, 고통이 한꺼번에 세상으로 풀려 나왔지만, 상자 속에 끝까지 남은 단 하나가 있었고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묻지 않고 지나치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 ‘희망’이 선물인가? 아니면 또 다른 덫인가?, 이 글은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희망은 위안이 아닐 수도 있다
판도라가 제우스의 계략으로 인간 세계에 보내진 후, 그녀는 금기시된 상자를 열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었죠. 그리고 온갖 재앙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지만 단 하나, 희망만이 상자 속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절망 속에서도 남겨진 마지막 위안”이라 이해하고 있죠.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원전에서 ‘희망(elpis)’은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기대나 욕망, 미련과도 같은 뉘앙스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적으로 말하자면, 희망은 미래에 닿는 방식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사유하느냐에 따라 그 구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희망은 그저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고유한 가능성으로서의 삶으로 각성하지 않을 경우 그 희망은 때때로 “지금 여기의 고통을 감추는 장막”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삶의 고통을 직면하지 않도록 유예시키는 일종의 “위장된 약”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약은 상처를 치유하지도 않지만, 감각을 무디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야’의 논리
우리의 일상은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서 부드럽게 포장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지금 당장 뭔가를 실행하지 않는 이유가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기겠지”와 같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우리의 결단에 바탕한 실행이 지연되는 이유가 “어쩌면 변할지도 몰라”라는 희미한 기대가 이면에서 작동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이름으로, 우리는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선택을 유예함으로써 외면하고, 고통의 인식은 억제하며, 내 삶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미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은 행동을 촉발하기보다는 정지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되고, 바로 이것이 익숙한 일상으로서의 편안하지만 무뎌진 삶이 되도톡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일정한 수준에서 위로하면서도 동시에 마비시키는 기능도 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되는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라는 말은 실제로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고통을 통과하는 희망
하지만 희망이 반드시 부정적인 덫으로서 기능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가능성에 대한 나답게 살고자 하는 내적 결단이 일어나는 순간, 그 희망은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희망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 고통을 통과하려는 용기와 결합하게 됩니다. 그것은 “언젠가 좋아지겠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이 고통을 책임지며 살아내겠다”라는 엄숙한 결의와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선택에서 길어올리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희망은 나를 깨우는 도구로서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실존은 과거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환상으로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이 나를 깨우는 도구로서의 희망은 고통과 죽음의 가능성을 통과하여 도달할 수 있는 우리의 고유성에 대한 열린 태도입니다.
이때 ‘희망’은 단순히 기분 좋은 환상이 아니라, “존재가 나에게서 요청하는 것에 응답하려는 진정한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이 되고, 그리고 그 응답은 우리는 둘러싼 주변을 다시 생성하면서 관계를 재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에 의한 기다림을 삶의 형식으로 기어이 바꿔내는것 가능하게 됩니다.
결론: 닫힌 상자와 열린 삶 사이에서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 상자를 닫을 수 없습니다. 불행, 상처, 질투, 죽음, 모든 것이 이미 세상 속을, 우리 주변을 부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상자에 남은 희망이 나로 하여금 '진짜 나'로서 사는 길을 마주하게 하는가, 아니면 지금 여기로부터 도피시키는가?”
우리는 너무도 흔하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마취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짜 희망은 우리 자신의 삶이 깊어지는 순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부풀리는 감정이 아니라, 현재를 기꺼이 감당하며 살겠다는 결단과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선택’에서 태어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것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물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을 벗어나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희망은 축복인가, 회피적 집착인가?”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나를 깨우는 순간이 우리 삶의 균열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고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