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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길(3): 시지프스의 벼랑

반복을 살아내는 우리들

by root


반복을 살아내는 우리들!
"그대는 이 삶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업무를 처리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합니다. 퇴근 후 같은 경로로 돌아오고, 같은 채널을 틀고, 같은 SNS 타임라인을 스크롤하죠. 때로는 이런 일상이 고맙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반복은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문득 이런 질문이 마음 한 구석을 건드립니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살아지고 있는가?’


시지프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고, 끝없이 바위를 벼랑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힘들여 정상까지 밀어 올린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고, 또 다시 그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합니다. 이 형벌처럼 보이는 풍경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살펴보시죠.

오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유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반복 속에서 나를 깨우는 ‘진정한 나 다움의 순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개방 될 수 있을까요?


반복의 감옥 ― 익숙하고 안정적이지만 결코 깊어질 수 없는 삶

시지프스의 반복은 겉보기엔 분명 형벌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힘든 일’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그것은 ‘의미 없음’이라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 방향이 없는 행위들과 목적 없는 지속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거운 형벌로서의 무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이런 의미에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반복되는 출근과 대화들 그리고 업무와 소비, 또한 기계적으로 찍히는 일상의 리듬들 바로 그 속에서 우리는 ‘나’를 잊어버립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왜 이걸 계속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은 채로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상태로서 안정적이지만, 결코 깊어짐이 허용되지 않는 삶입니다. 위협은 없으나 깨어있지도 않은 상태죠.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익명적이고도 일상성 속에 몰입된 존재(Das Man)’ 상태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방향도, 주체도, 물음도 없으며 단지 반복과 일상적인 관성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반복 속의 균열 ― 시지프스는 정말 ‘벌’을 받고 있었을까?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카뮈는 “시지프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카뮈에게 시지프스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자살하지 않고 삶을 계속 선택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비록 형벌처럼 반복되는 삶이라 하더라도 그 삶을 스스로 끌어안고 책임지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래서 자기 삶을 책임지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반복은 단순한 수평적 흐름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비록 매번 무너지고, 다시 시작하는 이 반복됨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단으로서 “도피하지 않고 자기 삶을 책임지겠다는 선택”을 마음속 깊이 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삶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라는 엄숙한 선언의 실천적인 행위라고 할 것입니다. 분명 반복은 외부의 강제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받아들임’과 ‘주체화’라는 진정 나답게 살고자 하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망각하게 만드는 반복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면,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선택으로서의 결단은 그 무감각 속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자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시지프스가 천신만고 끝에 밀어 올린 바로 그 벼랑 위 정상에서, 다시 굴러 떨어진 바위를 바라보며 절망이 아니라 또다시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진실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복을 살아내는 우리들 ― 나를 일깨우고,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묻는 순간

우리는 시지프스처럼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반복이 나를 무너뜨릴지, 아니면 나를 진정한 나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할지, 그것만은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속에서 무감각해진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하는 태도이며 의미 없던 일상의 루틴 속에서 의미를 구성해내고 진정 나답게 살고자 함의 실천적 양태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매일 보는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려는 노력,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타자와의 만남에 진심으로 반응하려는 자세, 정해진 일을 반복하더라도 그것을 ‘나의 일’로 수용하고 담대한 걸음을 내딛는 행위, 이런 실천들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일깨우는 삶의 태도는 결코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서 스스로 도피하지 않고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선택을 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 반복의 틈에서 깨어나는 ‘나 다움’

우리는 누구나 반복되는 삶을 살아 가지만 그 반복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걸음도, 같은 일상적 행위도, 같은 결정도 우리 각자가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이 됩니다.

반복의 일상에서 ‘나 다움’을 깨운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시지프스는 결코 위대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반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집니다.

"그대는 이 삶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망각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일상, 기계적 반복, 무비판적 흐름, 그러나 바로 그 안에서, 매번 다시 깨어나도록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선택으로서의 결단’, 그것이 우리 삶에서 우리를 일깨워 진정한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며, 삶이 이해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지프스처럼 반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반복 안에서 어떠한 고유한 삶의 결을 세우고,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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