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에 묻힌 자기의 상실
우리가 '나' 혹은 '너'로서가 아니라 '모두'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진정 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혹독한 바람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서로에게 의지한 채 무리 지어 체온을 나누는 펭귄들을 상상해 보시죠.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이 장면은 때때로 연대의 따스함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소비됩니다. 하지만 무리 지어 있는 수많은 펭귄들과 그들의 똑같은 자세와 표정, 똑같은 방향으로 서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펭귄이 누구인지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무리 안에서 한 개체로서 자신의 ‘얼굴’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또한 무리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같아짐’을 추구하면 할수록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더욱 깊이 고립됩니다. 군중 속의 고립 상태, 우리는 종종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
‘남들보다 튀지 말아야 한다.’
‘모두가 하는 대로 대세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조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경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것들은 ‘익명의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무리 속에서는 익명의 그들과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모두가 다르지 않고 같아서 튀거나, 불안하지 않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고유한 자기 자신’이죠.
익숙한 우리의 일상: 차이성을 없애는 평균성의 구조
‘군중 속의 펭귄’들은 단지 우화 속 이야기에 관한 것뿐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 내고 있는 일상의 구조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유행을 따르고, 직장을 선택하고, SNS활동과 대중적인 문화 등 다수가 형성하는 ‘일상적 평균성’이라는 지평 위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에 영향을 받고, 우리의 행위와 판단과 감정을 조율하며 살아갑니다. “이건 좋아”, “그건 싫어”, “요즘은 다 이렇게 하고 다녀”라는 말속에는 우리에게 부여된 암묵적인 외부 기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익숙한 일상의 세계는 예측 가능하면서도 소속감을 주어서 무척 안정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안락함 가운데 가장 고유한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개별적인 느낌과 표현, 생각의 가능성은 점점 닫혀갑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하고, 타인들 모두의 평균을 기준으로 조절하고, 유행을 따라가며 살아가죠. 그러면서 ‘고유한 나’는 점점 더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숨 가쁘게 뒤따르는 유행이란 것도 한 발짝 뒤에서 바로 보면 ‘모두가 같아지려는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하지만 유행의 선도자 이자 생산자들에게 유행은 절대적인 ‘다름’을 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 속에서만 생명력을 갖습니다. 바로 그 ‘다름으로써의 차이’를 기반으로 생산된 유행을 우리는 ‘같아지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 무척 역설적입니다.
고유한 나로서 살아감: 삶이 깊어지는 순간에 마주하는 낯섦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상성에서 벗어나려는 내적인 외침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모두와 다른 의견을 내거나,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때, 혹은 내가 지니고 있는 어떤 감정이 사람들 대다수가 따르는 일상적 규범과 어긋날 때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고유한 나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이죠. 뭔지 모를 ‘불안감’과 함께, 진정한 내 모습을 찾으라는 침묵의 외침이 일상성에 매몰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너는 진정 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결론: 펭귄 무리를 떠나 ‘얼굴’을 되찾는 여정
서두에 말씀드린 군중들 속의 펭귄, 그것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수도 있습니다. 편안하고, 따스한 일상의 질서 속에 서로를 밀착시킨 채로 ‘너’ 혹은 ‘나’ 로서가 아니라 ‘모두’라는 이름으로 일상적 평범성 속에 거주하고 있는 모습이죠. 하지만 우리의 삶이란 결국은 무리 지움 속에서도 ‘나 자신 만의 걸음’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끔 발을 헛디디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남아 외롭더라도, 자기 자신으로서의 그 고유한 리듬을 끝까지 인내해 내는 것이죠. 바로 그 ‘차이성’ 속에서만 우리는 일상성을 벗어나 ‘고유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