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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chi Apr 13. 2020

가드너 공 대리, 키덜트 박 이사

물리적 장벽 허물기

“저... 개발 2그룹, 황 그룹장님께 서류를 전달드려야 하는데, 그룹장님 자리가 어딘지 몰라서요..."

“주간 미팅 있어서 다들 회의실 가셨어요. 

 저기 파티션 너머 안쪽이 그룹장님 자리니까 서류는 올려 두고 가세요.”

'헐... 책상, 파티션 다 똑같은데 어디로 가라는 말이지?'

동일한 사무용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 선 사무실 중앙에 서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방향을 잃은 채 서류만 만지작 거리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일하는 사무 공간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반영해, 사무실 책상을 꾸미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사무용품이나 네임카드, 다과 박스는 기본이고, 식물, 물고기 등 생명체(?)를 곁에 둔 이도 있어, 누구의 책상인지 100m 너머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우리 팀 공 대리는 회색 파티션을 생기 넘치는 녹색으로 바꾼 '오피스 가드너'이다.  

테이블야자, 스킨답서스, 스파트필름, 몬스테라 등 다양한 공기정화 식물이 그의 자리에서 자라고 있다. 환경을 사랑하는 그는 플라스틱 커피 컵을 재활용하여 수경재배(토양 없이 물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를 하고 있으며, 점심시간, 퇴근 전 등 잠시 여유가 생길 때면 햇빛을 쬐어주거나 잎을 닦아주며 정성을 다해 식물을 키운다. 오피스 가드너 공 대리에게, 식물은 단순히 보는 즐거움을 주는 장식품이 아닌, 안정감과 힐링을 주는 반려의 대상이다.


365일 푸른 식물 곁에서 상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공 대리의 취미로, 우리 팀은 멀리서 보아도 녹색 빛이 돈다. 미세먼지가 갈수록 심해지는 데다, 환기가 쉽지 않고 냉난방으로 건조한 사무실에서, 공기정화 및 습도 조절에 탁월한 식물 덕분에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된 팀원들은 공 대리의 취미를 응원하고, 식물 관련 최신 정보를 그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공 대리의 대각선에 앉은 나는 큰 덕을 보고 있는데, 눈을 살짝 들면, 사무실 천장을 배경으로 녹색 식물들이 쭉쭉 잎을 펼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랜 PC 작업으로 눈이 뻑뻑할 때는, 인공눈물을 넣는 대신, 공 대리의 식물들을 몇 초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평소 동, 식물을 키우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도 '전자파 차단 효과가 있는 다육식물은 어떤 게 있는지', '스투키가 선물하기 왜 무난한지' 등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는, '조직 구성원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가치관이 반영된 취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달력과 검은색 다이어리가 아닌, 샛노란 빛의 펭수 달력과 알록달록한 스티커로 꾸민 개인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최 사원은 남들과 다른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보고서 주제와 매칭 되는 이미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심지어 디자인 전문업체에서 제작한 X-베너를 보고, 시안과 다른 점을 단 번에 찾아내기도 한다. 


이 대리와는 업무가 겹치지 않아 그를 잘 알지 못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들려오길래 물었더니 남다른 타건감을 자랑한다는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얼리어답터이자 게임이 취미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이처럼 구성원들의 개성이 반영되고 있는 우리 팀의 사무 공간은, 회색빛이 아닌 다채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분위기가 타 팀에 비해 높은 결속력과 원활한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라 믿는다. 




변화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중간관리자급 이상의 구성원에게도 나타났다. 그들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어, 예전보다 편안해졌고, 놀랍게도 리더의 변화는 사무실에 더 큰 활력을 가져다주고 있다. 


옆 팀 부서장 박 이사는 자타공인 키덜트이다. 그의 책상과 캐비닛 위에는 두꺼운 서류철이나 상패 대신 레고 조립품이 가득하다.

신입 사원 시절, 내가 찾던 그룹장의 자리가, 박 이사의 자리처럼 해리포터 성과 배트맨 레고로 꾸며져 있었다면, 나는 그의 책상을 단 번에 찾아내는 것은 물론이요, 행여 실수가 있을까 벌벌 떨지도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사무실로 배송되어 온 미개봉 레고 박스를 자랑하는 박 이사에게서 권위적인 리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원들이 먼저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 정도로, 박 이사는 젊은 구성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젊고 유연한 조직 문화 구축에 '꼰대스럽지 않은 취미'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리더가 그러하듯, 내 책상에는 책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서점,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곤 했는데, 이러한 내 취향이 은연중 사무 공간에 반영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 자리에 들르는 동료들은 좋아하는 작가나 최근 읽은 도서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꺼내는 일이 잦다. 종종 논문을 선물하러 오는 후배들이 있는데, 회사 생활을 하며 석사 학위를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나는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고 그 논문을 소중히 다룬다. "잘 쓸게, 라면 냄비 받침대로.", "두 권 더 줘 봐, 베개 높이는 돼야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던 후배들은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는 나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비록 나는 다소 꼰대스러운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나, 후배가 한 권의 논문을 내기 위해 쏟았을 노력에 대한 인정과 관심은, 세대가 다른 그들과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쯤 되면, 구성원의 연령대가 젊은 스타트업이나 창의적이고 트렌디한 업무가 주를 이루는 회사라 가능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나름 반전이라면, 우리 회사는 딱딱한 회계, 세무, 재무 자문이 주된 서비스인 곳으로, 혁신적인 기술이나 아이디어보다는 각종 국내/외 규정과 법령의 틀 안에서 업무를 행해야 하는 조직이라는 점이다.


'튀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조직에서, 어떻게 직급, 성별과 무관하게 구성원의 개성이 조직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반영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바로,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물리적 환경 조성'에 있다.




구성원의 개성을 인정하라


조직 내에서 다양성, 포용의 문화를 구축하는 것은, 아주 쉬운 행동부터 시작할 수 있다. 

구성원의 개성이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개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최근 2030 사이에 자리 잡은 플렉스(Flex) 문화는, 내가 무엇을 구매했는지 타인과 공유하고 후기를 남기는 등 취미 생활과 소비 행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문화인데, 이러한 개개인의 취향과 선호도가 조직에 반영될 때, 수직적이고 딱딱한 조직 문화가 훨씬 유연하고 수평적으로 바뀔 수 있다. 


워크샵이나 송년회와 같은 특별한 행사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내놓고 그룹 또는 본부 단위로 경매 행사를 진행해 보는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물건을 내어놓는 사람이 자신에게 이 물건이 어떤 의미인지, 평소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참여자들 간 서로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소중한 추억을 담은 물건이 이를 더욱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되니 더할 나위 없다. 나 또한, 처음 이 프로그램을 제안받았을 때는 과연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여러 차례 진행해 보니, 스토리텔링만 잘 진행되면 수익금을 기부까지 할 수 있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더십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가끔은 업무적인 대화에서 벗어나, 조직 구성원들의 관심사에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가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들의 마음을 보다 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




사무실의 물리적 장벽을 없애고 일상적 소통을 강화하자


팀원들 간의 장벽을 허물고 팀원 간, 부서 간 소통 및 협력의 다리를 놓는 것은 리더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하지만 많은 리더가 "팀원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다.", "왜 나만 등장하면 다들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모니터만 바라보는 것일까?". "도통 팀원들끼리 협력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며 고민을 토로한다.


리더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구성원의 개성을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한들, 구성원이 오늘부터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드러낼리는 없다. 리더와 팀원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 긴장하거나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 사무실 가구, 좌석 배치, 파티션과 같은 물리적인 환경을 변경하여 눈에 보이는 조직 내 장벽을 허무는 것은 심리적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왜 여행지에 열광할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설레고 이국적인 풍경에 심장이 뛴다. 회사도 그런 곳이면 어떨까? 물론 매일 심장이 두근거려서야 안 될 일이지만, 한 달에 한두 번쯤은 변화된 분위기와 조직 문화에 설레는 장소가 될 수는 없을까? 무거운 공기만 흐르던 회의실이, 어떤 날에는 젊은 직원들의 감각이 더해져 힙한 장소로 바뀌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직원들과 교류하는 스텐딩 파티장이 될 수는 없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심리적 장벽이 존재한다. 이 장벽은 소통을 단절시키고 편견을 낳으며 갈등과 차별을 심화시킨다. 그에 비하면 사무실의 물리적 장벽을 허무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세상에 넘지 못할 장벽만 있다면 우리의 조직 생활은 암울할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장벽부터 하나씩 없애 나간다면, 심리적 장벽 허물기도 불가능한 목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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