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전원 버튼을 만지작 거리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신날 수가 있을까. 공식적으로 휴대폰을 끌 수 있다니. 이제 누구도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 부사장도, 상무도, 부장도, 집사람도(?..미안합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저희 비행기 곧 이륙합니다. 기내에 계신..."
나는 점점 더 흥분해 갔다. 비행기야 출장 때문에 골백번도 더 타는 거지만 그냥 이렇게 공식적으로 브라질까지 24시간이 넘게 휴대폰 연락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나를 좀 무책임하다고 불러도 좋다(You can call me irresponsible).
비행기는 이륙을 했고 일정 고도에 오르면서 안전벨트 램프가 꺼졌다. 곧 승무원이 음료를 가져다 줄 시간이다. 고민이다. 무엇을 마실까, 와인, 맥주, 아니면 오늘은 좀 더 세게 위스키? 기내식 안내 책자를 천천히 넘긴다. Chef's choice? 뭐 이런 게 있다. 잘 됐다. 항상 선택과 결정을 많이 해서 힘든데 오늘은 좀 다른 사람이 결정해주는 것을 따라가 보자. 부르고뉴 어쩌고 저쩌고 란다. 난 와인을 잘 모르지만 이걸 마시면 왠지 좀 멋지게 취할 것 같다. 왠지 좀 더 달콤하게 잠들 것 같다.
"안녕하세요 손님, 음료 준비해드릴까요?"
승무원들이야 대개 다 수려한 외모에 친절하지만 오늘 이 승무원은 평소보다 더 특별한 것 같다. 3개월 만에 출장을 가는 내 기분 탓인지 그녀의 분위기 탓인지 모르겠다.
"알베르 비쇼 피노누아 에르따쥐 주세요"
그냥 레드 와인 주세요라고 하거나 메뉴판을 가리키며 이걸로 주세요 해도 되는데 오늘은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반사적으로 한번 본 와인 이름의 70% 정도가 생각나면서 멋있어 보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풀네임은 '알베르 비쇼 부르고뉴 피노누아 에르따쥐 1831'였지만 이걸 다 읊을정도 명석하지는 않다 에효. 하지만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푸훗. 이 허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두 잔을 마시고 세 잔째 반 정도를 비운 것 같다.
' 난 와인에 참 약해. 졸리네.'
오른손 손잡이 각도 조절 버튼에 손을 뻗어 등받이를 내린다. 180도는 아직 너무 빠르니 130도 정도만. 달걀형 창문으로 석양이 적당히 예쁘게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 파리를 거쳐 상파울루까지 아직 20시간도 넘게 남았다. 내가 살아갈 날도 아직 많이 남았으니 90도가 힘들면 130도로 내려가면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