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이 아닌 의로운 죽음으로
2부- 2018.04.15. 일요일
제주에서의 '주(酒)식(食)주(住)'
제주에 온 첫날, 서두른 퇴근에 비행기에 오르느라 대충 때운 끼니로 배고픈 우리들은 ‘엘린호텔’ 밖으로 나갔다. 제주시 연동7길은 ‘차 없는 거리’로 불빛 찬란한 거리였다. 우연히 발견한 ‘의정 설렁탕’ 집에 들어가 그 야밤에 각각 ‘도가니탕’을 시켜 밥까지 말아가며 배불리 먹었다. 제주의 소주 ‘푸른밤- 짧은밤’도 한 잔 하면서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빵빵하게 부풀었을 때 지난밤의 폭식이 너무 과했음을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제주에 온 둘째 날, 우리는 숙소 ‘라마다 호텔’ 문을 나섰다.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곳은 불빛도 휘황찬란한 아주 작은 독특한 분위기의 펍이었다. 5명 앉기도 비좁은 공간에는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이 나름의 존재를 뽐내며 실내를 꽉 채우고 있었다. 주인과 손님이, 중년과 젊은이가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인 모양이다. 우리는 ‘제주 위트 에일’과 다른 세계 맥주를 시키며 불빛에 취해갔다. 자주 만나는 정다운 사람들이지만 마음을 열고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 밤 나의 주정 ‘애교’가 발산된 것을 보니 꽤 많이 마신 즐거운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수익금 전액이 장애인 복지에 쓰이는 사회적 기업 ‘엘린호텔’, 끼니마다 먹었던 담백한 식사,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역 상점 이용하기 마음 등 어느 것 하나 거슬리지 않은 뿌듯한 여행이었다.
제주 안덕 동광마을 4•3길
임문숙 가족 헛묘
일요일 아침 찾은 ‘제주 안덕 동광마을 4·3길’은 ‘동광리 복지회관’에서 시작된다. 1948년 11월 동광리가 토벌대에 의해 완전 초토화 된 후 사람들은 ‘큰넓궤’로 피신하여 2 개월가량을 숨어 지냈으나 발각되자 다시 한라산을 향해 무작정 몸을 피한다. 그러나 모두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총살되거나 서귀포로 끌려가 정방폭포와 그 인근에서 학살된다. ‘임문숙 가족 헛묘’는 이 때 희생된 ‘임문숙 씨’ 가족 묘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신 없는 ‘헛봉분’이다. 시신이라도 찾아 영혼을 달래는 일도 이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희생자 9명의 봉분 7기(2기는 합묘)가 조성되어 있다. 무엇으로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풀꽃은 귀엽게 피었건만 억울한 영혼들과 유족들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이재수 난의 세 장두를 기리며
버스를 타고 대정고을에 이르니 낯익은 ‘돌하르방’이 서있다. 그 옆에는 세 장두(이재수, 오대현, 강우백)를 기리는 ‘제주대정삼의사비’가 있는데, 비석 뒤에 적힌 긴 사설조의 설명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1901년 정부의 부패와 일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 맞서 봉기한 제주 ‘이재수의 난’의 세 장두를 기리기 위해 60년이 지난 1961년에 세워졌는데 현재 자리(추사기념관 앞 쪽 도로)의 기념비는 1997년 대정고을연합회 주체로 다시 세워졌다 한다. ‘이재수난’은 천주교도들과 제주 민중 사이의 충돌로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문제로까지 커진 제주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
평화의 터
‘평화의 터’에 자리 잡은 육중한 비석과 저 멀리 보이는 ‘대정고등학교’ 자율 동아리 작품 ‘단편영화-4월의 동백’을 알리는 현수막이 각기 다른 이유로 인상적이었다.
위령비와 공덕비
‘대정 4·3사건 위령비’와 ‘목사 조남순, 면장 김남원 공덕비’가 ‘경찰서장 문형순’ 공덕비와 나란히 서 있다. 해설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쉰들러 리스트’를 떠올렸다.
‘좌익’이 뭔지 모르고, 그저 산(山)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빼앗기다시피 주었을 뿐인데도 ‘좌익명단’에 올려 총알을 겨누려 했으니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이들은 당시 좌익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에게 자수를 권고하고, 죄 없음을 ‘서장 문형순’에게 사정하는 등 각자의 위치에서 ‘제주 대정’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다. ‘문형순’ 공덕비에 관한 진실공방 인터넷 기사를 보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4·3의 아픔과 혼란이 느껴졌다.
섯알오름 학살터
백조일손지묘
버스를 타고 ‘섯알오름’으로 이동하는 바깥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내리자마자 보이는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는 주위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내무부 치안부가 ‘예비검속법’을 악용하여 모슬포 경찰 관내 344명을 잡아들여 집단학살하고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 ‘섯알오름’이다, 3차례에 걸쳐 법적인 절차도 없이 무고한 양민(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 학생 등)들을 검속, 감금하여 무참하게 집단학살을 자행한 곳이다.
이후 유족들에 의해 수습된 시신은 ‘만벵디 묘역(한림읍 금악리)’에 안치되었는데, 특히 구별이 어려운 132명의 시신은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이라는 뜻의 ‘백조일손묘역’(백조일손지지)에 안장되었다. ‘섯알오름’ 학살터 주변에 조성된 위령공원 안의 ‘희생자 추모비’ 앞의 검정 고무신이 그 날의 무고한 양민들의 마지막 발걸음인 양 아프게 올라 있었다.
알뜨르비행장 고사포진지
끔찍한 학살 현상 ‘위령공원’을 끼고 ‘섯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에 올랐다. ‘알뜨르 비행장 고사포 진지’는 일제 강점기에 미군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전략적 군사 시설이다. 이곳에 설치되었던 포대는 폭파 제거되었으나, 남아있는 콘크리트 흔적은 충분히 고사포 진지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제주 현장에 모두 둘러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무명천 할머니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달려 ‘진아영 할머니(무명천 할머니)’의 삶터를 보기 위해 ‘제주 월령리’ 바닷가로 향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진아영 할머니’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30대 젊은 나이에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총탄에 맞아 참혹한 인생을 살다 가신 할머니는 ‘4·3’의 참혹함과 억울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할머니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소박한 공간에서 왜 ‘무명천 할머니’라 불렸는지를 확인하니 소름이 끼치며 눈물이 나왔다. 총탄에 턱이 날아간 몸으로 살아난 것도 기적적이지만, 평생을 고단한 몸으로, 먹거리 한번 제대로 씹지 못 한 채로 살아낸 인생이 그저 비현실적이라 생전 할머니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이곳에 와서야, 오늘이 되어서야 할머니의 존재를 알다니 얼마나 4·3에 대해 무심했었는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마당에 핀 소복한 국화 옆에 ‘최상돈’선생님의 시가 할머니를 위로해 주는 듯 했다. 영상에서 그려지는 것과는 달리 끔찍한 일생을 사셨으면서도 밝은 분이었다고 한다. 마당에 둘러앉은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판소리를 감상하며 할머니를 생각했다. 아마 이런 환한 모습을 보면 좋아하시리라……. 부디 온전한 몸으로 마음껏 노래 부르고, 마음껏 행복하시길 할머니 영전에 기도드렸다.
월령리 바닷가
‘월령리’ 바닷가도 역시 멋진 모습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바닷가를 걷기도 하고, 해변의 멋스런 카페에 들러 커피도 마시며 놀란 가슴을 풀어냈다. 자연이 주는 치유에 몸을 맡겨 마음을 다독이었다.
도두봉 일몰
정뜨르 비행장
이제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해야 한다. 아쉬운 마음 한 가득이다.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최상돈’선생님이 일정에 없는 ‘도두봉’ 오르기를 제안하셨다. ‘섬머리 도두봉’에 올라 일몰을 보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함이다. 물론 꼬박 이틀 동안 안전운전으로 도움을 준 버스기사님의 또 다른 배려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가파른 ‘도두봉’에 오르자마자 바다 끝 저 멀리 일몰이 우리를 환호성 지르게 했다.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우리가 이틀 동안 보았던 일정들이 부드럽게 화해하고 결국은 상생의 길로 가야함을 저 지는 태양이 알려주는 듯 했다.
김수열의 시
멀리 보이는 ‘정뜨르 비행장’의 그 영혼들도 이 고운 태양빛으로 감싸주고 싶었다. 우리는 ‘김수열’ 시인의 ‘정뜨르 비행장’을 낭독하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했다.
-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 빠직빠직 빠지지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눈 감고 잠든 척하며 창밖을 외면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은 제주를 떠났다.
‘4·3 공원 위패봉안소’ 방명록에 적었던 문장을 기억한다.
‘잊지 않겠습니다.
잘 배워서 잘 가르치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소서.’
좀 더 바른 세상으로,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제주 동백꽃은 이제 내게도 절대 지지않는 붉은 꽃으로 4•3을 상징하는 화해와 상생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