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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Aug 24. 2019

신 대신 보냈다는 그분이 왜 나에게는 오지 않았을까?

우리 모두에게 엄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정희 찬밥

국어수업 '내 인생의 시'

 2학기 첫 국어 수업의 시작은 문정희 시인의 ‘찬밥’이라는 시로 문을 열었다.

문학 작품이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떻게 우리에게 내면화되는지 그 과정을 공부하는 단원이다.

 이것과 관련된 소단원 ‘내 인생의 시’라는 제목 아래 교과서에 소개된 시가 ‘찬밥’이다.    

       찬밥 -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게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만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훑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찬밥 그리고 엄마, 어머니

 화자는 몸이 아프다. 겨우 일어나 혼자 먹는 것이 찬밥이다. 편리해진 가전제품 덕에 찬밥 먹기가 오히려 쉽지 않았을 텐데 편리한 기계를 마다하고, 고통스럽게 밥을 넘기면서도 굳이 데우려 하지 않는다. 어쩌다 먹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찬밥을 먹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왜냐하면 화자는 찬밥을 통해서 그녀, 어머니를 만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따스한 밥을 지어주고 홀로 찬밥을 먹던 그녀, 우리에게 통통한 생선살을 먹이기 위해, 가시만 훑던 그녀, 밤늦도록 집안일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던 그녀, 오늘따라 더 그리운 그녀…….

 홀로 찬밥을 먹던 그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 얼마나 섭섭하고 속상했을까? 어려운 살림 형편에 자식들 챙기느라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 그때 나는 왜 그녀를 혼자 있게 했을까? 왜 다가가 찬밥을 같이 나누지 않았을까? 아니 따스한 밥을 권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화자는 속상해한다. 나이 들어 엄마처럼 홀로 찬밥을 먹어보니 어머니,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것 같다. 다시금 눈물겨운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느껴져 몸이 아픈 오늘 그녀가 더욱더 그립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를 만난다. 오늘 찬밥을 먹음으로써…….    
시를 읊을수록 밟히는 얼굴들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시를 낭독하고, 시구의 의미를 파악하고, 주제를 찾아 적어본다. 각양각색의 표현으로 주제를 찾아 적었지만 아무튼 주제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적 삶에 대한 깨달음’ 정도에서 모두 모인다.

 만고불변의 부모님 사랑, 그것도 어머니의 사랑을 논하는데 딴죽 걸 일이 무에 있을까마는 진즉부터 내 마음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곳곳에 밟히는 얼굴들…….

 현이, 민이, 영이, 은이, 원이. 린이, 빈이 (물론 이름은 가명이다) 등등…….    

 서둘러 엄마가 왜 엄마냐?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늘 나를 위해 주기 때문에 엄마가 엄마 아니냐. 그러므로 이 엄마 자리에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등 나를 사랑하는 사람 누구라도 올 수 있는 거다.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의 고마움과 감사함을 잊지 않으면 되는 거다.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들 얼굴을 다시 슬쩍 쳐다보았다.

모두에게 엄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무심코 그린 ‘우리 엄마 얼굴 그리기’ 수업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엄마가 절대 그립지 않다는 말을 하는 아이
이미 떠난 엄마에게는 새 가족이 있다며 고개 숙이던 아이
엄마라는 말에 벌써부터 글썽이던 아이
병색이 짙었던 마지막 엄마 모습을 떠올리는 아이

 이혼으로, 죽음으로 엄마와 떨어진 아이들이 많다. 심지어 엄마와의 어떠한 추억조차 없이 기억에서 멀어진 아이들도 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말을 교과서에 적으며 저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받아들였을까?

 신대신 보냈다는 그분이 왜 나에게는 오지 않을까?

 어머니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떠올릴 만한 이 좋은 시조차도 아픈 마음으로 봐야 하는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 다. 16살 인생에서 어찌 저런 파란만장한 유년의 삶을 살아왔는지 안타까운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너무 가혹하다. 아프지 말고, 상처 받지 말고 성장할 수 있다면 …….


 50이 훌쩍 넘었는데도 나는 매일 '엄마'를 찾는다. 배드민턴 게임이라도 할라치면 짧은 시간에도 수없이 '엄마'라는 감탄사를 남발한다. 그리고 가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기까지 한다. 사랑이 가득한 어떤 날에도 서럽다며 엄마를 부르며 울기도 한다.

 이제 열여섯밖에 안된 우리 반 민이와 창이는 이 눈물을 어찌 감당했을까?

 우리 모두에게 엄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엄마들이 사랑으로만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곁에서 따스한 밥을 챙기는 이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허기지지 않도록! 춥지 않도록!

 특히 아이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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