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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Dec 28. 2020

오빠를 위한 詩

이문세의 노래 '시를 위한 시'를 들으며

 1995년, 겨울!

 25년 전 여름, 온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은 아픈 사건이 있었다. 그 슬픔은 그해 추운 겨울이 와도 사라지지 않는 엄청난 상처였는데, 나에게는 더 큰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줄 미처 몰랐다. 25년 전 그 겨울만큼 나에게 아픈 시간이 또 있을까? 나의 유일한 형제, 33살 오빠는 그렇게 그 해 겨울,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올해, 오빠가 여전히 생각나는 것은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이 변변한 애도 과정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긴다.

 오빠를 위하여, 오빠만을 위하여 크게 울어보지 못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통곡하지 못했다. 나보다 더 슬픔에 빠진 엄마가 옆에 있었기에, 간당간당 목숨을 이어가는 엄마를 살펴야 했기에 때마다 유예시킨 울음들이 내 가슴 곳곳에 쌓였다, 모였다,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를 반복하며 25년이 흘렀다.

 

 바스러진 검은 재 같은 엄마를 모시고 15번의 제사를 지냈다. 부처님 아래, 차디찬 냉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법당에서 피 울음 우는 엄마를 부축하며 축문 속의 오빠 이름을 보았다. 절에서 십 여 차례 제를 올리고, 집에서 서툰 손으로 오빠에게 제를 올린 지 5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이제 그만 하자. 라며 허연 얼굴로 말씀하셨다. 이미 수년 전부터 엄마는 ‘이제 되었다’며 절에서의 제사도 만류했었는데, 나는 왠지 엄마 말씀을 따르면 안 될 것 같은, 엄마나 오빠가 너무 섭섭해할 것 같은 생각에 계속 제사를 지내오고 있었다. 아마 2010년 정도까지는 계속 오빠의 제사를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명절 차례 상에 오빠를 함께 올리는 것으로 대신해 왔다. 엄마 기제사를 챙기면서 오빠는 그냥 잠깐의 추모로 지나쳐 왔었다.

오빠는 여전히 33살!

 54살이 된 나는 33살의 오빠를 마치 아픈 손가락처럼 떠올린다. 가난하고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소환하여 많이 사랑하고, 따스하게 먹이고, 마음껏 지원하고픈 마음으로 오빠를 불러본다.

 오빠도 그때 그 마음이었으리라. 4살 어린 동생을 위해 호떡을 구워주고, 돈가스를 사 주고, 용돈을 주고, 좋은 옷을 사 준 것은, 사춘기에 마주한 가정의 파탄이 너무 아팠기에 동생에게는 울타리를 쳐 막아주고 싶었으리라. 집안에 콕 박혀 꺼져가는 동생이 기죽을까 봐 불러내 환한 거리를 함께 걸었으리라. 겨우 4살 많았을 뿐인데, 오빠도 방황하는 청소년이었을 텐데 그저 오빠라는 이유로 나에게는 언제나 어른인 척했으리라.

 

 이제 나는 동생이 아닌 어른의 마음으로 오빠를 쓰다듬는다. 오빠에게 주고 싶은 것만큼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는데, 줄 수가 없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용돈을 주고, 사소한 잘못을 매질이 아닌 어른스러운 말투로 타이르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방에서 쉬게 하고, 전봇대에서 공사를 하다가 떨어지는 일 따윈 아예 없도록 안전하고 건강한 스무 살을 선물하고, 맛집 탐방과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왜 아들에게 그렇게 했냐고 묻고 따질 수 있는데...

 

 오빠가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해 가는 곳에, 그까짓 사소한 돌부리 하나 없이, 전진하는 삶을 지지하고 응원해 본다. 여느 젊은이들처럼 또래에 할 만한 고만고만한 고민을 말하며 좌절이라 말하게 하고 싶다. 가난 때문에, 불화 때문에 멈춰 버린 아픈 것들을 과감하게 가지 쳐내 슬픔을 걷어내, ‘부모 잘못 만나서’라는 말은 절대 어울리지 않게 하고 싶다.

동생이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우리 오빠는 안다. -출처 다음 이미지
2020, 겨울!

 2020년 12월, 모처럼 오빠를 만나고 싶어졌다. 마침 금요일이라 시간도 여유로웠다. 퇴근 후, 여전히 서툰 솜씨지만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 가족이 모여 오빠를 추모했다. 오빠와 같은 나이의 젊은이었던 남편은 어느새 60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나와 함께 나란히 서 있고, 주머니에 넣고 출근하고 싶다던 조카는, 27살이 되어 조카 바보였던 오빠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잔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니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모를 눈물들이 왈칵 쏟아지며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아이들 앞이라 참으려 했으나 입술이 씰룩이고, 어깨가 들썩이며 남은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삼촌의 이야기를 말로만 듣던 막내가 내 등을 한참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삼촌은 모르나, 엄마의 슬픔을 알아주는 나이가 될 정도의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상에 둘러앉아 오빠가 평소 좋아하던 과자 ‘자갈치’와 다른 음식을 먹으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저돌적이고 유쾌했던 사람, 센 척하지만 한 없이 허당 끼가 있었던, 폼생폼사 인생을 즐겼던 나의 오라버니를 소개하며 웃어 보았다.

 아직 눈물은 다 꺼내지 못했다. 엄마와 오빠와 나, 이렇게 셋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던 어느 날의 그 밤이 다시 온다면, 아니 그 밤에 다시 모인다면 그때 꺼이꺼이 남은 눈물을 통곡으로 쏟아 내리라. 숭의동 찻길 옆 작은 방에서, 수봉공원 아래 좁은 빌라 안방에서 가졌던 수많은 밤들의 대화를 미소로 떠올리고, 누구 하나 기억할 리 없는 작은 인생의 흔적을 나만은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리라.

 오빠는 다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내가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말해 주고 싶다. 눈 내리는 겨울마다 얼마나 가슴이 시리고 미안한지는 그냥 눈빛에 담아 두겠으나.
오빠를 위한 詩

 오빠와 내가 다정한 오누이가 되어 신포동 거리를 걸어다녔을 그, 아마 어디선가 이 노래가 한참 흘러나왔을 것이다. 요즘 이 노래가 자꾸 오빠를 생각나게 한다. 30년도 더 불러진 노래가 새삼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은 그리움 때문이리라. 스물둘, 스물여섯의 의좋은 남매가 언제나 내 가슴속에 웃음 지으며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리라.

https://youtu.be/CLBwIXoeuG4

이문세 .'시를 위한 詩' 출처-다음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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